충효각(忠孝閣)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

문충공(文忠公) 휘(諱) 상용(尙容) 공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정문(旌門)이다.

충열사(忠烈祠)

인천시 유형문화재 21호
인천시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

1642년(인조 20)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우의정 김상용(金尙容), 공조판서 이상길(李尙吉), 장령 이시직(李時稷), 돈녕도정 심현(沈誢), 천총(千摠) 구원일(具元一)을 향사(享祀)하기 위하여 강화도 내의 유생과 유수부(留守府)의 재정적인 지원으로 건립된 사우이다.

김상용이 살았던 강화군 선원면 선행리(仙杏里)에 위치해 있으며 1658년(효종 9)에 사액되었다.

건립 때 6인을 제향했으나, 이들과 함께 순절하고도 입향(入享)되지 못한 인물의 후손들의 호소로 1657년에 훈련정 황선신(黃善身), 훈련첨정 강흥업(康興業)을, 1658년에는 금부도사 권순장(權順長), 생원 김익겸(金益謙), 필선 윤전(尹烇)을, 1728년(영조 4)에 좌승지 홍명형(洪命亨)을, 1787년(정조 11)에 광흥수(廣興守) 이돈오(李惇五)를 각각 추향하였다.

1788년에는 척화파로서 순절했던 홍익한(洪翼漢)과 병자호란 때 근왕병을 모아 남한산성으로 가려다 순절한 윤계(尹棨)를 함께 추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계속해서 추향하다보니 위차(位次)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숙종 연간이래 조정에서까지 논란을 벌이기도 했는데, 결국 김상용을 주향(主享)으로 하여 동쪽에 이상길·홍명형·이시직·윤계·황선신·권순장·김익겸, 서쪽에 심현·홍익한·윤전·이돈오·송시영·구원일·강흥업의 순으로 각기 배향하게 되었다.

현재에는 29위가 배향되어 있다.

충신각(忠臣閣)

청주시 유형유적 128호
청주시 청원구 북이면 현암리

1960년에 판관공(용)파 19세 휘(諱) 극(棘)공의 충절을 기리어 세운 정려이다.

지금의 충신각은 1976년에 보수한 건물로 정면 1칸, 측면 1칸 겹처마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이다. 정려의 사면은 홍살로 막고 안에는 충신문 편액과 기문판(記文板)을 걸었고, 밖에는 “충신려(忠臣閭)”라는 현판을 달았다. 앞에 문을 세우고 둘레에는 담장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일묘사충(一廟四忠)

여주시 대신면 초현리

초현리 아랫새재마을의 안동김씨세장지 내에 건립되어 있는 정려문이다.

정면 1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좌우에 방풍벽을 설치하였다. 처마 밑에는 후손이자 근래의 명필인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이 대예(大隷)로 쓴 “일묘사충지문(一廟四忠之門)”이란 편액이 걸려 있는데, 이는 하나의 정려문에 충신 네 명의 정려문을 안치했다는 뜻이다.

사충(四忠)이란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으로 사사(賜死)된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 1629~1689)과 1722년(경종 2) 신임사화 때 죽임을 당한 그 아들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1648~1722), 손자 죽취(竹醉) 김제겸(金濟謙, 1680~1722), 증손자 취백헌(翠柏軒) 김성행(金省行, 1696~1722)을 말함이다.

이들은 모두 노론의 핵심 인물들로서 극심한 정쟁에서 희생당했으나 훗날 전부 신원(伸寃)되고 충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러나 정려문 내부에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김성행의 정려문판만 걸려 있을 뿐, 나머지 세 명의 것은 보이지 않는다.

김성행의 정려문판에는 대자(大字)로 “충신(忠臣) 증대광보국숭록대부(贈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겸영경연(兼領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 시충정공(諡忠正公) 김성행지문(金省行之門)”이라 하고 소자(小字)로 “정종(正宗) 갑진(甲辰, 1784, 정조 8) 팔월(八月) 명정(命旌) 금상(今上) 무오(戊午, 1858, 철종 9) 삼월(三月) 일(日) 가증상상(加贈上相)”이라 각자하였다.

봉화 충렬사(忠烈祠)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임진왜란시 의병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곳으로 구전(苟全) 중청(中淸) 학산(鶴山) 인상(麟祥)공등이 합사 되어 있다.

김인상(金麟祥) 정려각(旌閭閣)

창녕군 부곡면 거문리

임진왜란시 봉화 노루재 전투에서 순의(殉義)하신 충의사(忠義士) 학산(鶴山) 인상(麟祥)공의 정려각

시좌(時佐)공 정효각(旌孝閣)

안동시 풍산읍 상리

참봉공(시좌)파 파조의 효자 정효각이다.

삼강당(三綱堂)

안동시 풍산읍 상리

충의사 김인상, 효자 김시좌(金時佐) ·김사리(金士利) ·권순(權詢) ·권강(權杠) ·정헌(鄭憲), 열부(烈婦) 김씨(金氏) 등을 모신곳이다.

제균(濟均) 정효각(旌孝閣)

의성군 다인면 송호리

진사공(홍)파 25세 제균(濟均)의 정효각이다.

김제균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효자의 마음이 조정에 알려져 공이 태어난 사호 마을 앞에 지역 유림에서는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확인하고는 1940년 4월 효자 포창지(褒彰誌)를 받아 정려되었고, 포창과 함께 효자 각을 세웠다.

광복 후 증손 만동(萬東)이 비각을 세웠다. 비각은 단칸(單間)규모의 우진각집인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2짝 철 대문을 달아 비각으로 출입케 하였다.

비각의 전면에는 홍살을 세워 내부의 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였는데, 비각 내에는 “孝子鳳窩金濟均之碑(효자 봉와 김제균지비)”라 각자한 석비(石碑)가 세워져 있다. 가구는 3량 가의 소로 수 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김제균 효자각(사부)이 2013년 12월 새로 단장한 모습이 보인다. 효행사실을 기록한 ‘봉와 공 행적’은 <낙파 유고> 집에 수록되어 있고, ‘정효각 상량문’은 김조현(金祖顯)이 지어 고사하였다. <봉와 공 실기>가 전한다. 

정근(正根) 정문(旌門)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승의랑공(기보.극)파 23세 정근(正根) 정문(旌門)이다. 정조22년(1798년)에 세워졌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일자형 건물이다. 중앙의 1칸은 솟을대문이고, 지붕은 홑처마 맞배지붕이다. 솟을대문 위에는 ‘효자성균진사김정근상지이십이년명정(孝子成均進士金正根上之二十二年命旌)’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부자(父子) 정효각(旌孝閣)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

사직서령공(생하)파 24세 병형(炳衡)과 그 아들인 성균(聖均) 父子가 모두 부모에게 효행이 뛰어나 영해부를 중심으로 한 경상도의 유생들과 관리들이 정부에 상소하여 정효각을 고종으로부터 하사받게 됐다. 1867년에 건립된 정효각이라는 현판은 후에 영의정을 지낸 민규호가 적었다. 父子 양대의 효행을 기리는 父子 정려비 두 개가 함께 서 있는 것이 특이하다. 건립과 관련된 상소문등을 모은 기록이 "양천세록"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열부(烈婦) 김해김씨(金海金氏) 비각(碑閣)

안동시 서후면 태장리

사헌공(원수)파 25세 휘(諱) 호규(昊圭)의 배(配) 김해김씨(金海金氏) 효열비(孝烈碑)

 

영양천씨(英陽千氏) 효열각(孝烈閣)

안동시 풍산읍 노리공원묘원

예의소승공(생)파 26세 순진(舜鎭)의 배(配) 영양천씨(英陽千氏) 효열각(孝烈閣)이다.

남양홍씨(南陽洪氏) 정려각(旌閭閣)

울진군 기성면 삼산리

진사공(영균)파 26세 휘(諱) 원진(源鎭)의 배(配) 남양홍씨(南陽洪氏) 열여비(烈女碑)이다.

남편의 병환에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남편을 잃은 후에는 시부모를 평생 봉양하여 광무 8년(1902)에 정려를 받은 김원진의 처 남양홍씨 정려각이다. 동잠산 배밭마을 입구 우측 산록에 위치하며, 산 사면에 석축으로 터를 만들어 정려비와 비각을 세웠는데 서향으로 터를 잡았다. 

이천서씨(利川徐氏) 열여비(烈女碑)

안동시 문화유산 87호
안동시 율세동

호장공(처상)파 22세 창경(昌慶)의 배(配) 이천서씨(利川徐氏) 열여비(烈女碑)이다.

김창경은 곤궁한 중에 서씨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곤궁한 살림에 시부모는 소경과 앉은뱅이 불구였지만 서씨는 남편과 시부모를 극진히 모셨다. 그러나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어 남편 김씨는 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서씨는 극진한 효성으로 시부모를 봉양했으나 아들을 잃고 난 시부모는 홧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서씨는 장례식을 마친 후 9일간의 단식 끝에 목숨을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