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조참의(刑曹叅議)  양근(養根)


자는 선오(善吾) 호는 동야(東埜). 할아버지는 김응태(金應泰)이고 아버지는 김제순(金濟淳)이며 첨지중추부사 김우순(金宇淳)에게 입양되었다.



1763년(영조 39) 사마시를 거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에 보직되고 이듬해 만녕전별검(萬寧殿別檢)에 이어 전적(典籍)과 병조낭관(兵曹郎官) 등을 지냈다.

1773년 시폐(時弊: 당시에 정치적·사회적인 문제나 폐단)를 논하는 소를 올려 문제가 되자 낙향하였다가 이듬해 지평(持平)에 복직되었다.

1786년(정조 10)에는 옛 사람의 선행을 그린 그림을 세자에게 바쳐 모범으로 삼도록 하여 정조의 칭송을 받았다.뒤에 현풍·음죽(陰竹)의 현감을 역임하였고 1799년 통정대부에 가자되어 형조참의를 지냈다.



경상도 안동(安東) 출신이며 문집으로 『동야집(東埜集)』 14권 6책이 있다.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동야고택(東埜古宅)

문화재자료 제193호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동야(東埜)는 김양근(金養根)의 호(號)다.공이 이집에서 태어났다.
동야고택은 집 쪽으로 터진 울타리를 갖는다. 울타리 안으로 들어서면 잘 자란 잔디밭이 바깥마당을 뒤덮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바깥마당으로 나와 서 있는 것은 사랑채이다. 정면 5칸 측면 1칸의 규모이다. 높은 대좌 위에 올라서 있는 집인데 아래쪽으로는 계단도 섬돌도 마련되어 있지 않으므로 쉽게 올라갈 수 있는 구조가 아니다.

바깥마당이 위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높아져서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열려 있는 지점에서는 이 대좌의 높이를 극복하므로 그쪽을 통해 사랑채로 오르는 모양이다. 들어가는 입구 쪽에서 조금 올라가면 중문이다.

사랑채의 중문 쪽 1칸은 마루방이다. 정면 쪽은 터져 있고 측방은 나무틀이 마련되어 열려 있다. 두 번째 칸은 안쪽으로 조금 들어앉은 방이다. 정면 쪽에는 폭 좁은 툇마루가 있다. 이곳의 처마 밑에는 동야고택이라는 현판 글씨가 보인다.

동야집(東埜集)

조선후기 문신·학자 김양근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845년에 간행한 시문집.
14권 6책. 활자본. 1845년(헌종 11) 손자 도균(度均)·하균(夏均)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홍직필(洪直弼)과 김이양(金履陽)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강태중(姜泰重)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 국립중앙도서관 장서각 도서 등에 있다.
권수에 총목(總目)이 있고 권1∼3은 부(賦) 2편 시 165수 가행(歌行) 21수 권4는 의고(擬古) 9수 악부(樂府) 19수 권5는 소 3편 권6은 서(書) 39편 권7은 서(序) 9편 기 14편 권8은 제발(題跋) 13편 설 2편 상량문 3편 명 12편 찬 1편 송(頌) 1편 고문(告文) 6편 권9는 제문 34편 권10∼12는 행장 16편 서(敍) 5편 전(傳) 8편 권13은 잡저 7편 권14는 부록으로 행장·묘갈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행·의고·악부는 한문으로 된 악장가사인데 국문가사와 비교하여 지은 것으로 가사문학연구에 참고자료가 된다.
서(書)에는 스승인 김원행(金元行)을 비롯하여 김시찬(金時燦)·김이양·송환기(宋煥箕)·정당(鄭棠) 등과 주고받은 것이 많으나 가벼운 시사와 인사가 대부분으로 학문적인 내용은 별로 없다.서(序)의 「돈의계서(敦誼稧序)」와 「단향일잉설종회서(壇享日仍設宗會序)」는 친족간에 화목을 도모하기 위하여 회와 돈의계를 조직하면서 계의 목적·동기를 자세히 밝힌 것이다.
「제화왕산성창의록후(題火旺山城倡義錄後)」는 임진왜란 때 화왕산성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한 곽재우(郭再祐)를 중심으로 많은 의병장들이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친 창의(倡義)의 전말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다.
「권씨가삼충효전(權氏家三忠孝傳)」은 안동권씨 3대의 충효를 칭찬한 기록이며 이밖에도 충효와 열부에 관한 많은 기록이 있다.,

승의랑공(기보.극)파
系子양근(養根)
생부(生父)응남(應南)
자(字)선오(善五)
호(號)동야(東埜)
생(生)1734년 갑인(甲寅) 12월 24일
관직(官職)만녕전(萬寧殿)별검(別檢)
전적(典籍)
병조(兵曹)낭관(郎官)
형조(刑曹)참의(叅議)
저서(著書)동야집(東埜集)14권6책이있다.
 사리에 맞게 간함을 잊지 않아서 전관원들이꺼려 하였다.1773년 시폐(時
 弊: 당시에 정치적·사회적인 문제나 폐단)를 논하는 소를 올려 문제가 되
 자 낙향하였다가 이듬해 지평(持平)에 복직되었다. 1786년(정조10)에
 는 옛 사람의 선행을 그린 그림을 세자에게 바쳐 모범으로 삼도록 하여 정
 조의 칭송을 받았다.뒤에 현풍·음죽(陰竹)의 현감을 역임하였고 1799년
  통정대부에 가자되었다.
졸(卒)1799년 기미(己未) 5월 16일
묘(墓)예천군(醴泉郡) 감천면(甘泉面) 대맥리(大麥里) 대산촌(大山村) 뒤 본생
 조(本生兆) 오른쪽
 묘갈이 있는데 족조(族祖) 봉조하(奉朝賀) 이익(履翼) 이 지었다
해좌(亥坐)
배(配)숙부인(淑夫人)전주이씨(全州李氏)
생(生)1732년 임자(壬子) 월 일
졸(卒)1811년 신미(辛未) 6월 29일
묘(墓)안동시(安東市) 풍산읍(豊山邑) 소산리(素山里) 사지촌(笥池村) 뒤 정산
 (井山)
곤좌(坤坐)
묘표(墓表)가 있다
 부(父)지송(志松)
 조(祖)생원(生員) 여항(如沆)
 증조(曾祖)참의(叅議) 형상(衡祥)
 외조(外祖)진사(進士) 정희수(鄭熙叟) 본(本) 초계(草溪)
20 세21 세22 세23 세24 세
현석(玄錫)응태(應泰)우순(宇淳)양근(養根)병관(炳觀)
김홍교(金弘敎)
이원순(李源淳)
박경헌(朴景憲)
남이환(南以煥)
조희창(趙喜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