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원루(淸遠樓)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보물 제2050호(2019년 12월 30일 지정)

조선 중종 때 평양서윤(平壤庶尹)을 지낸 김번이 관직에서 은퇴하고 돌아와 여생을 보낸 곳이라 하며, 병자호란 때 예조판서로서 남한산성에서의 굴욕적인 화의에 반대하다가 청나라 심양에 6년간 인질로 끌려가 화를 당하고 귀국한 김상헌(金尙憲)이 낙향하여 은거하던 곳으로, 기존 건물을 누각식으로 중건하면서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하였다 한다.

우리나라 정자 편액에 붙여진 ‘청원’은 송나라 주돈이의 ‘애련설’에서 취했다. 주돈이는 연꽃을 군자에 비유했다. ‘비록 진흙에서 나왔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물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으며 속은 비었지만 겉모습은 곧으며 넝쿨도 가지도 없이 향기는 멀어질수록 맑으며 꼿꼿이 맑게 심어져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 가서 만질 수는 없는 존재’라고 노래했다. ‘향기는 멀어질수록 맑아진다 香遠益淸’이 원전이다. 김수온이 기문을 쓴 전남 순천의 청원루도 서거정이 쓴 충청도 청안의 청원정 기문도 주돈이의 ‘향원익청’에서 정명을 취했다고 밝히고 있다. 청나라를 철천지 원수로 여긴 김상헌은 ‘향원익청’의 청원을 비틀어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본래 두 채의 건물로 41칸이나 되었으나, 1934년 대홍수 때 허물어져 현재 청원루만 남아 있다. 평면은 정면 7칸 측면 4칸에 ○자형인데, 정침은 기단을 매우 높게 쌓은 후 앉혔고, 정침 좌·우 익사(翼舍)는 누마루처럼 꾸몄다.정침 대청은 앞쪽에 2척 정도의 폭으로 한 단 낮게 마루를 깔아 2단으로 구성하였다.

정침 전면 원주상부는 길고 날카로운 살미를 끼워 주두(柱頭)를 얹고 내측으로 보아지를 두어 대량을 받게 하였고, 도리 방향으로는 창방 없이 공아(栱牙)를 짜서 장여[長舌]와 처마도리를 받도록 하였다.양 익사는 통주로 정침과 달리 창방을 보내고 살미와 보아지를 끼웠다. 이 건물은 평면구성과 구조양식 특히 창방을 생략한 수법 등에서 독특한 모습이 보인다.

청원루가 있는 소산마을은 본래 금산촌(金山村)이었다. 안동김씨 집성촌이다. ‘앞에 큰 들이 있고 땅이 기름져 온갖 곡식이 잘 된다’고 《영가지》는 기록하고 있다. 김상헌은 김씨 집성촌이름을 금산촌이라고 하는 것은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느낌이 들어 온당치 못하다’며 소산리로 바꿨다. 소산은 ‘검소하고 신의를 중하게 여기는 씨족이 사는 마을’이라는 설과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소요산의 이름에서 따왔다고도 하고 소요산이 소가 누워있는 모양을 하고 있어 그렇게 부른다는 설도 있다. 소산마을에는 청원루 외에도 삼구정, 안동김씨 종택, 선앙동김씨종택 묵재고택 동야고택 비안공구택등이 있어 유서깊은 마을임을 증거하고 있다.

김상헌은 청원루에서 지척에 있는 삼구정에 자주 들렀던 모양이다. 삼구정은 동오동산이라는 작은 구릉 위에 있어서 풍산들을 한눈에 내려보기 좋은 곳이다. 삼구정은 김영수 김영전 김영추 삼형제가 노모 예천권씨의 장수를 기원하며 지은 정자다. 김영수는 노모가 세상을 떠나자 한양 장의동으로 이거를 하였는데 아들 김영과 김번이 문과에 급제했다. 김영은 소산마을로 낙향해 소산파의 파조가 됐고 김번은 장의동에 살면서 장동김씨 파조가 됐다. 김상헌이 김번의 증손자다. 김상헌은 증조부의 흔적이 있는 삼구정에 올라 풍산들을 바라보며 시를 짓곤 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삼구정팔경’이다.

‘비개인 뒤 학가산의 맑은 봉우리,
 마애산의 깍아지른 듯 한 절벽,
 현리의 자욱한 봄 경치,
 겨울철 역동의 푸른 노송
 넓은들판의 누렇게 벼가 익어가는 풍경,
 낙동강가에서 그물로 고기잡는풍경,
 더운 삼복기간 정자에서 더위를 피함
중추가절에 감상하는 달’이다.

안동에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굴욕적인 항복에 대한 회한이 씻겼을 리 없다. 그는 괴로운 마음을 시로 담았다. 나라는 다 깨진 뒤 몸만 남쪽으로 내려와서 사람 만나 당시 일을 말하려니 부끄럽다사립문에 기대어 새로 뜬 달을 바라보니 누가 산중에 있는 이 늙은이의 마음을 알겠는가 ?

김상헌이 죽은 뒤 청원루도 퇴락했던 모양이다. 김상헌의 손자 김수증이 청원루를 돌아본 뒤 ‘화산기’에 글을 남겼다.“ 저녁에 소요산素山에 도착해서 곧바로 삼구정에 갔다. 정자 앞에는 교목 한 그루가 있다. 세 개의 거북돌은 우뚝하지만 오래된 소나무는 거의 다 꺾이었다. 곧장 옛날 지내던 집으로 들어가니, 나무가 썩고 기울어 거의 지탱할 수 없었다. 동쪽 각 몇 칸은 서윤 선조(김번)께서 독서하셨던 곳인데, 우리 형제가 어렸을 때 한 이곳에서 책을 읽었다. 작은 방은 할아버지(김상헌)께서 거처하셨던 곳인데, 지금은 하인이 지키며 살고 있었다. 방과 뜨락은 황폐해져 발을 붙일 곳도 없었다. 집 오른쪽에는 우물이 있으며 우물가에는 대추나무 한그루가 옛날 그대로 이다.”김상헌의 호 ‘청음’은 ‘소나무와 대나무 등의 시원한 그늘’을 운치 있게 표현한 말이지만 또다른 의미가 있다.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1동은 김상헌의 또다른 은거지인 석실이 있는 곳, 미음이다. ‘청음’은 ‘맑고 깨끗한 미음마을’을 뜻하기도 한다. 그의 다른 호 ‘석실산인’은 여기서 나왔다. 김상헌이 죽은 뒤 후손들이 이곳을 세거지로 삼아 살면서 ‘석실서원’을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봄 가을로 제사를 지낸다. 17~18세기 조선의 학계와 문단을 주도한 대학자와 문장가가 많이 배출됐다. 인재 중에서도 그의 손자와 증손자 등 9명을 ‘삼수육창’이라 부른다. 손자 3명은 ‘수’자 돌림이고 증손자 6명은 ‘창’자 돌림이다.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도 석실서원 출신이다. 김상헌의 후손인 미호 김원행의 제자다. 조선의 3대연행록은 김창업의 ‘노가재연행록’ 박지원의 ‘열하일기’ 홍대용의 ‘담헌연기’이다. 이들 모두 석실서원 출신이다.

안동 청원루(경북도 유형문화재 제199호)가 2019년 11월 14일자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예고됐다. 문화재청과 안동시는 예고 기간(30일) 각계 의견을 수렴하고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2019년 12월 30일(관보제19558호) 최종 지정되었으며 보물 제2050호이다.

청원루는 ‘ㄷ’자 평면구성을 띠는 매우 희귀한 정자형 별서(別墅) 건물이다. 17세기 향촌사회 유력 가문의 건축 형태를 엿볼 수 있는 시대성과 계층성이 반영된 연구자료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 17세기 조선 향촌사회에 머물러 있던 지식계층의 건축 특징이 잘 드러나 있어 역사·학술적 가치가 있다. 난간과 머름을 포함한 장식이 극히 배제된 건축 조형성이 강직한 선비의 성품을 잘 드러내 인문적인 요인이 어떻게 조형적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