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民族代表) 완규(完圭)


부 병유(炳游)와 극현(克鉉)의 딸 연일정씨와의 사이에서 1877년 7월 7일 종로구 연지동 107번지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호(號)는 송암(松巖) (족보에는 송석(松石))이다.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서울 사람이며 천도교(天道敎) 인이다.
한말(韓末)에 여수 통신주사(麗水通信主事)와 한성부주사(漢城府主事)를 지냈다. 한일병합 후에는 천도교에 입교하여 봉도(奉道)·법엄장(法奄長)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25일경 천도교의 기도회 종료보고와국장참배를 위해 상경한 그는 손병희(孫秉熙)·권동진(權東鎭)·오세창(吳世昌) 등을 만나 3·1독립만세운동 계획을 듣고 이에 찬동하여 민족대표로서 서명할 것을 동의하였다.

이 달 27일 최 린(崔麟)·오세창·임예환(林禮煥)·나인협(羅仁協)·홍기조(洪基兆)·나용환(羅龍煥)·홍병기(洪秉箕)·박준승(朴準承)·양한묵(梁漢默)등의 동지와 만나 김상규(金相奎)의 집에 모여서 독립선언서와 기타 문서의 초안을 검토하였으며 이들과 함께 민족대표로서 성명을 열기하고 날인하였다. 3월 1일 오후 2시경 인사동(仁寺洞)에 있는 태화관(泰華館)에는 민족대표 33인으로 서명한 사람 중에서 지방에 거주하는 길선주(吉善宙)·유여대(劉如大)·김병조(金秉祚)·정춘수(鄭春洙) 등 4명이 빠지고 29명이 모였다.

그는 이 때 민족대표의 1인으로 참여하여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는 만세삼창을 외치고 일본경찰에 의하여 경시청총감부(警視廳總監部)에 구금되었다가 1920년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혐의로 2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천도교 도사(道師)가 되어 종교활동과 민족운동을 계속하였고 광복 후에는 국민회 재정부장(國民會 財政部長)을 지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현충원 애국지사 묘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