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대장(義兵大將) 대규(大圭)


부 병도(炳度)와 한패(漢覇)의 딸 평해황씨 사이에서 1851년에 태어났고 자(字)는 순집(舜集) 호(號)는 학남(鶴南)이다.

1905년 을사조약 늑결에 격분함을 금치 못하고 11월 17일 청송(靑松)주치(周峙)와 울산(蔚山) 불영사(佛影寺)에서 경상도와 강원도 일대의 지사들과 회합하여 의거의 기치를 올릴 것을 결의하였다.이들은 동지 규합을 호소하는 격문(檄文)을 지어 살포하여 의병 5백 명을 모병하였다. 곧 그들에게 적절한 무술훈련을 실시하여 실전에 대비하였다.

1906년 2월 영양(英陽) 입암교동(立岩橋洞)의 자택에서 의진의 부서를 확정하고 김대규는 도포장(都砲將)에 피선되었다.그 후 진보(眞寶) 오누지(池) 작전에 참전하였다. 이 때 일본 헌병 무등(武藤)을 비롯한 적 수 십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그 중 무등은 그 일대 의병탄압의 책임자로서 의병운동 전개에 막대한피해를 끼친 자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므로 그 의의는 매우 컸다.

1906년 5월 울진 죽변 왜관 전투(蔚珍竹邊倭舘戰鬪)에서 적과 접전하여 크게 물리쳤다. 8월에는 잔류병력을 정비보강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의병장이 된 김대규는 휘하의 병사들을 훈련시켜 전력을 보강하여 전투에 대비하였다.10월에 이르러 병왕동(屛王洞)에서출동한 왜적을 맞아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역부족하여 적에게 사면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야음을 틈타 물 속으로 뛰어들어 수영으로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그 후 안동(安東) 임동면(臨東面) 대곡(大谷) 태백산맥 일월산맥 등의 산악지대에 의지하여 적과 대치하여 교전을 하였다.의진의 치열한 방어전에견디지 못한 왜적들은 인근의 산악지대에 불을 놓는 방화작전(放火作戰)으로 대처하였다.

결국 김대규는 불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1907년 11월 21일에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김대규장군 기념비
      영양군 입암면 방전리


        청송군 진보면 세장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