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규(恒圭)


자(字)는 경희(景羲)이며 1880년 11월 11일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수(炳秀)와 정부인(貞夫人) 파평윤씨 사이에 셋째 아들로 서울 계동 76번지에서 태어났다.

경상남도 밀양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그 후 전라남도 광양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899년 12월에서 1905년 12월까지 대한제국 하급 관료(경기도 연천군 군서기관) 직책을 지냈으나 1905년 12월 하급 관료 직책을 그만둔 후 1919년 경기도 개풍에서 3·1 대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그 후 1927년 2월 홍명희(洪命熹)·안재홍(安在鴻) 등은 민족협동단일전선체로서 신간회(新幹會)를 발족시킨 뒤, 이미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서울청년회계(系) 사회주의자들과의 협동전선체적 성격을 띠고서 1926년 7월에 발족해 있던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측과의 합동 교섭을 개시하여, 민흥회측이 신간회로 합류한다는 합의를 얻어내고 성공적인 합동을 기하게 되었다.

이때 민흥회 측 대표 5인 중의 1인이던 그는 신간회로 합류한 뒤 1927년 12월 신간회 경성지회(京城支會)의 서무부 총무간사로, 1929년 7월 중앙상무위원과 조직부장으로 임명되었다. 1929년 12월 그는 신간회의 다른 간부들과 함께 광주학생운동을 옹호, 지원하기 위한 민중대회를 서울 안국동(安國洞)에서 개최키로 결정하여 행사 계획을 세우고 준비를 하던 중 일경의 사전 검속으로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1930년 11월 신간회 제4회 중앙집행위원회 석상에서 신간회 서기장 겸 서무부장(新幹會 書記長 兼 庶務部長)에 임명되어 1931년 2월에 신간회가 폐지 및 해체되는 시절 마지막 순간까지 신간회 폐지론을 반대하고 조직을 보위하기 위한 활동을 계속하였다. 그 후 1945년 경성 마포에서 8·15 조선 광복을 목도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고자 1993년 3월 1일을 기하여 대한민국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現有勢力 總調査, 新幹, 農總, 勞總, 靑總, 槿友, 天道敎, 基督敎, 佛敎
新幹運動-會員四萬 咸南北 最盛
新幹會中央委員 金恒圭

新幹會는 반도에 현재 40,100여명의 충실한 회원과 139개소의 支會를 가지고 잇슴니다. 이밧게 조직 진행 중에 잇는 지회가 35개소나 잇스니 不遠에 그 회원 총수가 4萬 3,4千을 헤일 것이요 또한 지회 수효도 백5,60을 헤이* 될 盛運에 이를 모양이외다.

이것이 1927년 2월 창립 이래의 일이니 겨우 3,4년 동안에 이러틋 놀라운 세력을 문치게 된 것을 보면 新幹精神과 그 운동이 엇더케나 이 땅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오는 것임을 알 것이외다.그런데 新幹運動의 세력의 분포상황을 보면 慶尙南北道와 咸鏡南北道가 제일 충실하고 또한 활발함니다.

즉 慶南 一道에만 25개의 지회가 잇는데 榮州의 金東弼씨, 安東의 李雲鎬씨, 대구의 崔允東 柳淵述씨 등은 모다 그 지방의 유력한 지도자들이며 또한 咸鏡道로 보면 元山, 安邊, 咸興, 利原, 端川, 北靑, 洪原, 定平, 吉州, 會寧, 鏡城, 德原, 羅南, 淸津, 城津 기타 등지에 24개소가 잇는데 그 중에도 가장 驚嘆할<26> 곳은 咸北 鏡城支會 안의 漁朱支會외다.

그곳의 농민, 상공업자들은 대개 그 지회에 입회하여서 총수가 1,500여명을 헤이고 잇스니 회원수에 잇서서 京城支會와 伯仲하고 잇는 텨임니다. 그곳에는 李圖遠씨 등이 꾸준한 노력을 보이고 잇슴니다.그러고는 全羅南北이겟지요. 全南은 木浦, 長城, 求禮, 咸平, 靈岩, 光陽 등 다 훌융한 지도자를 가지고 잘 하여 나감니다. 全北은 全最盛이고 그 다음이 南原이겟지요.

平南은 平壤, 鎭南浦, 安州 等 支會가 有數하지요. 平壤은 曺晩植씨와 그 외 여러분들이 만히 활약하나이다.그러고 다소 신간회운동이 넓고 깁고 크지 못한 곳은 平北, 忠南北, 黃海, 江原 등이라 하겟지요. 平北으로 말하면 宣川支會가 600명의 회원을 擁하고 李龍吉씨 등이 활약하여 주어서 크게 볼 것이 잇스나 그박게 龍川, 義州, 博川 등은 활발치 못하다 할박게 업고 忠南을 말하면 洪城 1個所가 가장 꾸준한 데 거기에는 金淵鎭 尹大榮氏 등이 분주하고 잇습니다.

그 외에도 長湖院이나 唐津에 잇기는 하나 아직은 미미하다 할박게 없고 忠北으로 말하면 淸州 1個所가 有力하고 黃海로 말하면 載寧에 잇스나 그 亦 他道에 비하야 손색 잇고 그 박게는 업서서 아마 新幹運動이 제일 不振한 곳이 此道일가 함니다.

江原道는 江陵支會가 가장 强大하고 高城, 原州 等 支會는 그리 시원하다 할 것이 업겟슴니다.나중에 京畿道로 말하면 서울이 제일이어서 회원수 1,600여명을 擁하고 잇는 이이며 그박게는 仁川, 水原, 廣州, 開城, 江華 여러 도시에 잇지요.그러나 지방마다 특수 정세가 다르니까 부득이 아직은 이와 가치 균형을 이럿스나 未久에 모다 충실하여지리라고 밋습니다.

그것은 각지에 마다 우리 운동을 차츰 차츰 정당하게 인식하는 이가 만허지는 까닭과 유력한 선구자들이 만히 뛰이나올 것을 여러 가지 점으로 밋게 되는 까닭이외다.그러고 40,000여명의 회원들의 직업을 보면 농민이 100分之50, 상인이 仝20, 노동자 仝20, 기타는 敎役者, 신문기자, 교사, 변호사, 의사, 무직자 등일 것이외다.

 재정은 큰돈이 모여진 것은 아직 업스나 그 회비가 年年히 상당히 되어 가며 끗흐로 본부의 각 機關 責任者 氏名을 적으면 중앙집행위원장 許憲, 서무에 黃尙圭, 財政에 金炳魯, 교육에 朴熙道, 출판에 李鍾麟, 연락에 徐廷禧, 조사에 李春塾, 조직에 金恒圭, 선전에 李灌鎔等 諸氏요 中央委行委員의 총수는 40여 명이외다. 그러고 全 朝鮮의 新幹운동 관계자로 방금 투옥 혹 구금자 수가 許憲 이하 140여 명 올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