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동(爀東)


경북 영덕(盈德) 사람이다.

1919년 당시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知品面 洛坪里)에 살고 있었으며 기독교계통 인사들에 의해 주동되고 경상북도 내에서 대중적인 항일저항의 위력을 발휘한 이곳 영덕의거에서 북장로파 영수(北長老派 領袖)로 활약하였다.

이곳 기독교 장로교회 조사(助事) 김세영(金世榮)은 평양신학교(平壤神學校)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으로 가다가 서울에서의 3·1독립운동의 실황을 보게 되었고 이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 독립만세운동을 제의 하였다.

그는 김세영의 주동아래 거사계획의 일환으로 영덕읍의 강우근(姜佑根) 등 동지를 규합하고 거사를 의논하였다.1919년 3월 18일 약정한 거사일에 그는 군내의 기독교인과 농민들을 규합하여 3 000여 명에 이르는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만세시위를 주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이날의 만세시위 때 순국자 8명 부상자 16명이 발생하고 주동인물로 피체되어 재판을 받은 사람만도 96명에 이른다.그는 이해 5월 2일 대구지방법원 영덕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언도받고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그후 1920년 5월부터 1945년 8월까지는 고향에서 교회활동을 통하여 교인들에게 배일사상과 애국심을 고취시키며 활동하다가 8·15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