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성(大司成) 복한(福漢)


1860년 7월 24일 봉진(鳳鎭)과 이규(李圭)의 딸인 연안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원오(元五) 이며 호(號)는 지산(志山)이다.

 사람됨이 헌앙(軒昻)하고 지조가 굳었다. 1892년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하여 교리(校理)와 양사(兩司)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에 사서(司書)에 제수되고 통정(通政)으로 승임되었으며 이어서 대사성 형조참의(大司成 刑曹參議)를 거쳐 1894년 승지(承旨)에 제수되었다. 그 해 6월에 갑오개혁이 시작되고 모든 제도를 고쳐 일본식의 신제도가 채택되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 충남 홍주(洪州)로 귀향하여 스스로 지조를 지키고자 하였다.

1895년 이른바 을미사변과 단발령(斷髮令)이 내려졌다. 김복한은 이대로 수수방관(袖手傍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의 내종형이 되는 전 승지 이 설(李 )과 함께 동학농민운동을 수습하는데 공이 컸으므로 관찰사로 임용된 이승우(李勝宇)를 설득하여 창의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승우는 의병 일으키는 일에 대하여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국정 개혁을 반대하는 일은 동학농민운동을 수습하는 일과는 다른 일일 뿐더러 자신의 이해관계에 상반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편 같은 홍주 땅에 살고 있던 안병찬(安炳瓚)과 임한주(林翰周) 그리고 임피현령(臨陂縣令) 오영석(吳榮錫)도 거병할 생각을 갖고 이승우에게 의향을 떠보았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때에 홍주 남쪽에 살고 있던 안병찬의 부친 안창식(安昌植)은 박창로(朴昌魯)·이봉학(李鳳學)·이세영(李世永)·정제기(鄭濟驥)·송병직(宋秉稷)·조병고(趙秉皐)·김정하(金正河) 등과 의논하여 민병 180명을 소집하여 채광묵(蔡光默)으로 하여금 거느려 아들과 함께 거사할 준비를 마쳤다. 이에 대중들의 뜻을 확인한 김복한은 홍주 입성 날짜를 1895년 12월 1일로 확정하고 성내에 있던 홍 건(洪楗)을 통하여 관찰사의 의중을 재차 확인하였다. 홍 건은 관찰사 이승우가 자진하여 먼저 군사를 발동할 인물이 아니니 의진의 뜻대로 일을 추진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러나 홍 건 역시 일이 닥치자 마음이 흔들려 믿을 만 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규합되지 못하고 있을 때 박창로 청양(靑陽) 현감 정인희(鄭寅羲) 등이 의병 수백 명씩을 보내어 후원하였다. 이에 용기 백배하여 송병직(宋秉稷)·이세영(李世永) 등이 관문으로 들어가 새로이 설치한 경무청을 부수고 참서관(參書官) 함인학(咸仁鶴)·경무관(警務官) 강인선(姜仁善)을 포박하고 죽이고자 하였다.

일이 이쯤 발전되자 이승우가 만류하면서 창의하는 데에 협조할 것을 약조하였다. 스스로 관찰사라는 일본식의 관명을 버리고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이 되어 각 포구와 열읍에 창의한 것을 알렸다. 12월 3일 각 의병진의 대표들이 김복한을 수석으로 삼고 홍주 관하의 각 고을과 공주부(公州府)의 각 면으로 통문을 보내어 독자·노약자를 제외하고 집마다 군정 1명씩을 징집케 하였다.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하여 송병직을 서면 소모관으로 채광묵·이창서를 남면 소모관으로 그리고 이세영·이봉학·이병승을 공주(公州)로 파견하였으며 박창로·정제기는 임존산성(任存山城)을 수비하도록 내보냈다. 오직 성안에는 김복한·홍 건·안병찬·이상린이 남아서 창의소 일을 관장하고 있었다. 거의한지 며칠이 되지도 않았는데 홍 건과 이승우는 내외의 명망가의 호응이 없음을 초조히 여겨서 김복한을 힐문하였다. 한편 청양현감 정인희는 창의소를 본읍에 설치하고 포군(砲軍) 5백 명과 화포(火砲) 천 자루를 보내 달라고 요청해 왔다. 그러나 홍주의진의 본부에는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보내 주지 못하였다.

12월 4일 김복한과 이 설이 성중 본부에 있는데 관찰사 이승우의 초청을 받았다. 수상하게 여겨 여러 사람이 구하려고 하는데 강호선(姜浩善)이 순검들을 데리고 와서 체포하여 구금하였다. 안병찬·이상린 등이 관문을 부수고 구하고자 하였으나 그들 역시 체포당하였다. 이리하여 의진의 수뇌격 인사들이 차례로 구금되었다. 그후에 홍주의진의 기치 아래에 의거를 일으키고자 서산군수(瑞山郡守) 성하영(聖夏永)·남양부사(南陽府使) 남백희(南百熙)·대흥군수(大興郡守) 이창세(李昌世)·전 승지 김병억(金炳億)·정인희 등이 군사를 발동하여 홍주 근처까지 이르렀을 때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돌아가 버렸다. 그 중에 정인희는 이웃 고을과 연합하여 관군과 접전하였으나 경무관 강호선에게 패하였다. 김복한은 체포되자 함께 수감된 안병찬에게 "일이 이미 실패되었으니 죽을 따름이다" 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장례 및 후사까지 유언하였다. 그리고 절조 없는 이승우에게 기대하였던 자신을 자책하였다.

끝내 이승우도 경무관 강호선의 모함에 빠지고 말았다. 을미 홍주의병에 관련되어 체포된 23명중 6명이 서울로 압송되어 갔다. 즉 김복한을 위시하여 이 설·안병찬·송병직·이상린·홍 건 이었다. 이들은 1896년 2월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李範晋)에게 문초를 받았는데 김복한은 의병 일으킨 의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공술하였다.

"복한은 대대로 녹을 먹은 집안으로 남달리 나라 은혜를 입었사오니 죽음을 맹서하고 나라에 보답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본래부터 축적된 것입니다. 갑오(甲午)년 6월 이후 시골에 엎드려 그대로 죽으려고 했던 것이온데 지난 8월에 큰 변을 보고서는 너무도 원통하고 더 살고 싶지 않은데다 다시 또 11월 15일 사건이 생겼으니 이것이 모두 흉역(凶逆)의 행위가 아닙니까. 임금님의 욕되심이 극도에 달하자 신자의 충정이 더욱 격하여 마침내 시국 형세와 자기 역량을 계산하지 않고 다만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어 보겠다는 목표 하에 의거를 제창했던 것이 온데. 모사가 치밀하지 못하여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만약 경솔히 거사했다는 이유로써 죄를 주신다면 실로 달게 받겠으며 본시 의리를 망각하고 당을 모아 변을 일으키자는 것은 아니었습니다."2월 25일 김복한은 10년 유형을 선고받았다.

홍 건·이상린·송병직·안병찬은 3년 유형 그리고 이 설은 곤장 80대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날 밤으로 고종은 이들의 충성심을 감안하여 모두 석방하고 아울러 홍주의진에 관련되어 홍주성에 수감된 17인도 모두 석방하도록 특지(特旨)를 내렸다. 김복한은 즉시 고향으로 돌아와서 짐을 꾸려 보령(保寧)산중으로 들어가 학도들과 강론하여 지냈다. 그의 재능을 아끼는 신기선(申箕善)의 추천으로 성균관장(成均·長)에 제수되었으나 "···학식 없는 몸이 이 직책을 맡을 수도 없거니와 더구나 받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본다. 지금 의리가 없어지고 강상이 무너져서 원수놈도 아직 물리지 못했고 역적도 다 처벌되지 못했는데 만약 이때에 은혜를 느끼고 위엄을 두려워하여 명령을 받게 된다면 소신을 어김과 동시에 교화에 대한 죄가 어떠하겠는가. 은명(恩命)을 거역하는 것이 극히 불안스러움을 모르는 바 아니나 천성이 변할 수도 없고 소신을 굽힐 수도 없다···"하여 사양하였다.


 
 
             김복한과 제자들
 
         추양사 -- 복한의 사당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70-4

1897년에 다시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제수받았으나 지병인 각기병을 핑계하여 사양하였다. 그 해에 명성황후를 복위(復位)하고 예장(禮葬)을 시행하게 되자 그의 족형인 판서 김종한(金宗漢)이 편지를 보내어 관직에 나갈 것을 권고하였다. 그러나 김복한은 퇴계(退溪)와 도암(陶庵)도 인산(因山)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후세의 군자들이 그것을 비난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현재의 정황을 감당할 능력이 없음을 들어 여전히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을사의병이 거국적으로 일어났다. 을미의병의 동지인 안병찬이 민종식(閔宗植)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일군과 크게 접전하다가 1906년 2월 23일 체포되었다.앞서 이 설은 김복한이 신병으로 누워 있으므로 의거할 짝이 없음을 한탄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홀로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마침내 이 설과 함께 병든 몸을 이끌고 서울에 올라와 상소하여 역적을 성토했다. 이일로 1개월간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 이후 안병찬과 함께 의거한 민종식은 홍주 방면으로 진출 유준근(柳濬根)·이 식(李·) 등의 추대로 의병대장이 되어서 1906년 4월 26일 홍주성에 입성하였으며 만여 명의 연합의진이 구성되었다.

그러나 윤 4월 7일 일진회원의 내통으로 홍주성은 함락 당하고 이어서 일제는 의병관계자 소탕전을 전개하였다. 겨우 피신하여 의병운동을 전개하던 민종식·이용규 등이 모두 체포당하였다. 김복한은 이들 민종식 등 홍주의진과 연루되었다 하여 10월 28일 공주부(公州府)의 관헌들에 의해 체포되어 11월 1일 서울로 압송되었다. 여기에서는 일인 보조원 단우현태랑(丹羽賢太郞)의 문초를 받았다. 문초과정에서 단우는 오히려 김복한을 숭배하는 마음이 생겨 신병으로 고생하는 그를 위하여 편의를 봐 주고자 하였으나 여러 가지 방해가 있어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문초의 내용은 민종식과 을미의병과의 관계 등이었다. 그러나 만나고 싶어하던 만종식을 보지 못하여 한스럽게 여겼다. 결국 민종식과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는 증거를 찾지 못한 일제는 11월 26일 김복한을 석방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풀려 나오면서 민종식에게 시 한 수를 부쳤다. 민종식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후에 특사로 풀려났다.

1907년 10월 또다시 홍주의진의 인물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10월 1일 안병찬 형제와 윤난수(尹蘭秀)·이필한(李弼漢)·조광희(趙光熙) 등 5인이 홍주에서 체포 구금되었다가 공주부로 압송되었다. 그리고 13일에는 김복한·박홍양(朴鴻陽)·이훈영(李薰榮)이 보령(保寧)에서 체포되어 공주부로 압송되었다. 김복한은 압송되던 길에 조현(槽峴)에 이르러 일인 순사에게 곤장으로 두들겨 맞고 또 총으로 위협 사격까지 받았다. 그들은 복한에게 군사를 주둔시켜 둔 곳을 대라고 위협한 것이다. 왜냐하면 전에 복한이 청양 서평(靑陽黍坪)의 명정진(明鼎鎭)의 집에 들렀을 때 강도 5 6명의 습격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때 복한의 신분을 알고 그들 중 한 사람이 "왜 창의를 하지 않느냐"고 질문하여 "지모도 재물도 없어서 창의하지 못한다"고 대답하니 "포군 천 명과 돈 만냥을 드릴 터이니 원수를 갚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였던 일이 있었다.

이 일이 후에 누설되어 체포 선풍이 일게 된 것이다. 공주부에 수감되는 사람들은 모두 머리카락을 잘리우는데 경무관 황종복(黃鍾復)의 노력으로 면할 수 있었다. 온갖 수욕을 받다가 석방되어 돌아온 복한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어째서 해마다 횡액을 당하느냐 남에게 못지 않는 수구심(守舊心)때문이야죽고 삶은 마침내 운명이 있어 병든 몸 간신히 공주를 벗어났네. 갖가지 치욕이 연전보다 더하거니 외로운 신하 산다는 것 부끄럽구려 깨끗이 몸 갖기도 쉽지 않으니 오히려 도연명이 부러워진다. (年年橫逆問何因 守舊一心讓人 ·覺死生終有命 殘骸收拾渡熊津 萬端危辱倍前年 只愧孤臣尙苟全此時自靖非容易 却羨淵明臥葛天) 이러한 피를 토하는 충절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침략 야욕을 불식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해를 거듭할수록 심화되어 갔다.

그러한 마지막 고비에 안중근(安重根)의 의거를 보고 홍주의거에 대한 반성인 듯 다음과 같은 시 한 수를 읊었다.

제갈량은 유씨를 돕고 장량은 한(韓)을 도와
고심한 대의는 불꽃같이 빛났으나
골짜기에서 불이 꺼지고 철퇴를 헛날렸으니
이 모두 하얼빈의 총알만도 못하였구나
(諸葛扶劉張報韓 苦心大義炳如丹谷中火熄椎虛擲 總讓爾賓一砲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다시 파리 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 서명하였으며 서명자 137명이 모두 일경에 체포되었고 그는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결국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