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희(炳僖)


1886년 사헌부 감찰을 지낸 찬근과 풍양조씨 사이에서 다섯째 아들로 대전시 유성구 송정동에서 태어났다.

자(字)는 성극(聖克) 호(號)는 해창이다.

1917년만주에서 활동하다가 귀국 도중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9개월간 옥고를 치렀다.1919년 7월에는 미국에서 온 박용만(朴容萬)의 지도로 불라디보스톡에서 이민복(李敏馥)·조성환(曺成煥 : 서울출신)·백준(白準) 등과 함께 서북파(함경·평안·황해)를 제외하고 기호파(경기·충남북)를 중심으로 독립군을 편성하고자 하였다. 아울러 이러한 계획하에 간도 길림지방의 동지들과 협조하여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조직, 총사령부를 블라디보스톡에 두고 조성환을 총사령에, 박용만을 총참모에 임명하기로 약속하고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타의 동지들과군자금을 모으고자 하였다. 이때 그는 박상환(朴祥煥)과 함께 경성중학교(京城中學校) 교장 김성수(金性洙)와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용강면(龍江面)에 거주하는 부호 민영달(閔永達)에게 군자금을 청하러 가던 중 다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1년에는 조선일보 편집국장겸 주필로서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과 조국광복에 주력하였다. 1923년에는 조선일보 북경(北京) 상해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김원봉(金元鳳)을 단장으로 하는 의열단과 협력하여 일제 요인암살과 관공서 파괴를 시도하였으며, 1925년 신민부가 조직된 뒤에는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1926년 국내 독립운동 공작을 위하여 귀국하던 중 1927년 4월경에 체포되어 김연수(金演秀)·여봉구(呂鳳九)·이기진(李基珍) 등과 함께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으나 고문의 여독으로 1928년 4월 26일 순국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