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소공(竹所公) 광욱(光煜)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회이(晦而) 호는 죽소(竹所) 1580년 9월 7일에 태어났다.
형조참판 김상준(金尙寯)의 아들이고 김상용(金尙容)의 조카이다.
모친은 전주이씨 천우(天祐)의 딸이며 당숙으로 김상헌(金尙憲) 종질(從姪)로 영의정을 지낸 김수흥(金壽興)이 있다.
1596년에 우찬성(右贊成) 전주이씨 직언(直彦)의 딸과 혼인하였고 1606년 증광시(增廣試)의 진사시(進士試)와 대과(大科)에 급제하였으며 1608년 광해군 즉위 후인 9월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다.

1609년 8월 시교(待敎)가 되었다가 12월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說書)가 되었다.1610년에 사서(司書) ·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 ·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1611년 정언으로 있을 때 이언적(李彦迪) · 이황(李滉)을 배척하며 문묘종사(文廟從祀)에 반대하던 정인홍(鄭仁弘)을 탄핵하였으며 대북(大北) 정권이 추진하던 폐모론(廢母論)에 반대하여 미움을 샀다.
1612년에 병조 좌랑이 되었다가 1613년 정협(鄭浹)의 무고로 옥사에 연루되어 부친과 함께 체포되어 삭직 당했고 모친상을 당하였다.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강사(江舍)에 은거하여 남과 접촉하지 않았으며 1623년 인조반정 이후에야 다시 벼슬에 나아갔다.
1628년에 직강(直講) 1629년 사복시 정(司僕寺正)과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1630년 판교(判校) 1631년 홍주목사(洪州牧使) 1633년 관향사(管餉使)가 되었고 1635년 부친상을 당했다. 1637년 동부승지(同副承旨)와 우부승지(右副承旨) 1638년 나주목사(羅州牧使) 1640년 장예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1641년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1642년 호조참의(戶曹參議) 1644년 우승지(右承旨)와 좌승지(左承旨) 세자시강원 좌부빈객(世子侍講院 左副賓客) 1645년 도승지(都承旨)가 되어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세자 책봉문을 지었다.

1646년 동의금(同義禁) · 예문관 제학(藝文館 提學) · 호조참판(戶曹參判) ·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1648년 공조참판(工曹參判) 1649년 지의금(知義禁)이 되어 인조가 승하하자 애책문(哀冊文)을 지었으며 행장찬집청(行狀纂集廳)의 찬집관(撰集官)이 되었다가 11월에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었다. 1650년 지돈령(知敦寧) · 한성판윤(漢城判尹) · 경기감사(京畿監司) · 지중추(知中樞)가 되어 변사기(邊士紀)의 역모(逆謀)를 적발하였다.

1652년 개성유수(開城留守) 1654년 동지정사(冬至正使) 1655년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가 1656년 1월 24일에 사망하였고 1748년에 문정(文貞)이란 시호를 받았다.천성이 단아하고 곧아서 남과 사귀기를 즐기지 않았다. 글씨에 뛰어나 <인조명정(仁祖銘旌)>을 썼으며 『장릉지장(長陵誌狀)』을 편찬하였다. 저서로는 『죽소집(竹所集)』 2책이 전한다. 당시 김상용(金尙容)과 더불어 전서를 잘 쓰기로 이름을 떨쳤다.


                 시문
 
           수흥이 쓴 묘지명

                        묘
 
   題新搆江榭(제신구강사) 杏湖歸來亭(행호귀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