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참판(吏曹叅判) 광현(光炫)


조선 중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예가이다.

자는 회여(晦汝) 호는 수북(水北)이다.

부친은 우의정 김상용(金尙容)이다.

1625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홍문관 정자 · 수찬 등을 지냈다. 정묘호란 때 이조판서 심열의 종사관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에는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에 갔다. 이 때 강화 함락으로 부친 김상용이 분신자결하여 그 복상으로 홍주현 충남 홍성에 내려갔으며 호종의 공으로 대사간이 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뒤에 청주목사로 있으면서 청나라 연호가 적힌 문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다.전주(篆籀)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해서도 잘 썼다고 한다.

전서와 해서의 필법은 가법(家法)에서 나온 것으로 부친 김상용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632년에는 가선대부로서 인목왕후의 명정(銘旌)을 쓰기도 하였다. 문집에 "석봉 한호 서를 집자해 시를 쓴다."는 기록을 보아 해서는 한호로 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가법에서 전래된 전서의 맥락은 대를 이어 나타나는데 작품에서 그 연관성이 잘 드러난다. 전서로는 <이암신도비(李庵神道碑)> <구공신도비> <서공신도비> <정대년신도비>의 두전이 있다.전서는 가법에서 유래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한예로 부친 김상용이 쓴 <숭인전비(崇仁殿碑)>의 두전을 들 수 있다. 획의 굵기가 고르고 시작과 끝이 장봉세(藏鋒勢)의 원필(圓筆)로써 원만하게 처리된 것이 특징이다.

또 김수항이 전서로 쓴 <송국전묘갈(宋國銓墓碣)>과 김수증의 <정철신도비(鄭澈神道碑)>의 두전에서도 가법(家法)의 상관관계를 살필 수 있다. 김상용과 김상헌 형제 그들의 아들과 손자대에까지 전서를 애호한 맥락이 이어졌다.

예서 또한 관심을 가져 김상용의 아들 김광현과 그의 아들 김수빈(金壽賓) 그리고 김상헌의 손자인 김수증의 예서 작품이 두루 전한다. 김광현의 현존하는 유일한 예서 작품으로 <증별>이있는데 예서는 당시 거의 쓰지 않는 서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서를 쓴 것을 보면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전예에 관심을 기울이는 시기였는데 그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특히 별자(別字)가 많이 나타나며 해서의 필획을 담고 있지만 예서의 일반적 형태를 잘 이해하고 쓴 것으로 보인다. 그보다 앞선 시기에 활동한 허성의 예서보다는 좀 더 정제되어 있고 획에 각이 많이 들어가 웅건한 느낌을 준다.

아들인 김수빈의 예서 작품도 전하고 있으며 김광현의 예서와 서로 매우 흡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