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충공(文忠公) 상용(尙容)


자는 경택(景擇), 호는 선원(仙源)·풍계(楓溪)·계옹(溪翁).
노서(老西)의 영수로, 병자호란 때 순국했다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극효(克孝)이고, 어머니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의 딸이다. 좌의정 상헌(尙憲)이 그의 동생이다. 정유길에게 고문(古文)과 시를, 박수(朴受)에게 〈주역 周易〉을, 윤기(尹箕)에게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을 배웠으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했다. 성혼(成渾)의 문인이기도 하다. 이항복(李恒福)·신흠(申欽)·오윤겸(吳允謙)·이정구(李廷龜)·황신(黃愼)·정협(鄭曄)·이춘영(李春英) 등과 사귀었다. 1582년(선조 15) 진사가 되고, 1590년 증광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부정자·예문관검열을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활동했다. 1598년 성절사(聖節使)로서 명에 다녀온 뒤 도승지·대사헌·병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를 두루 지냈다.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서울을 지켰다. 서인으로서 한때 북인의 견제를 받아 외직으로 물러나기도 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한 뒤 노서(老西)·소서(少西)로 나누어지자 노서의 영수가 되었다. 1630년(인조 8) 기로사(嗜老社)에 들어가고 1632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늙었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병자호란 때 묘사주(廟社主)를 받들고 빈궁(嬪宮)·원손(元孫)을 수행하여 강화도에 피난했다가 강도(江都)가 함락되자 초문에 쌓아놓은 화약에 불을 지르고 자결했다. 한때 그의 죽음을 놓고 자분(自焚)이 아니라 실화(失火)라는 이설이 있었으나, 박동선(朴東善)·강석기(姜碩期) 등의 변호로 순국을 기리는 정려문(旌閭門)이 세워졌다. 1758년(영조 3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