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사묘는 안동시 번화가인 북문동 24-1번지에 5동(棟)의 전통건축양식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15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태사묘에는 병산전투에서 후백제 견훤의 군사를 물리치고 고려 건국에 크게 공을 세운 오김(吾金)의 시조 김선평(金宣平)과 안동권씨의 시조인 권행(權幸), 안동장씨의 시조인 장길(張吉) 등 삼태사의 위패(位牌)가 모셔져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곳에서는 매년 춘추 중월중 정일(春秋 仲月中 丁日)에 향사를 거행한다.

삼공신묘는 고려 성종 2년(983년)에 안동부사내(安東府司內)에 창건했으며 삼공신 위판(三功臣 位版)은 부사에서 옮겨 모시다가 강릉태생인 김광철이 중종 37년(1542년) 안동부사로 재임하고 있으면서 처음으로 신위(神位)를 모실 집을 지었다.
그 당시에는 정초, 단오, 추석, 동짓날등 1년에 4번 제사를 지냈으나 1585년 도유사인 송암 권호문의 주창으로 춘추향사, 즉 1년에 봄과 가을에 2번 봉사키로 결정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1608년 11월에 유사였던 권중상, 권함, 김태, 장흥효가 삼공신의 위판 신주의 글자를 고쳐 쓰게 하여 권오(權晤)가 썻다. 또한 임진왜란 때는 안금이(安金伊)라는 묘지기가 후손들도 무관심한 삼태사의 위판을 길안면 국란 계곡의 깊은 동굴속으로 정성껏 모셔다가 3년이나 봉안했다. 그러다가 임란이 끝나고 나라가 평안해지자 나라에서 임금님이 그 소식을 듣고 안금이의 뜻이 갸륵하다고 여겨 첨지라는 벼슬을 내렸다. 그리고 세월이 많이 지나 그가 죽자 경내의 한귀퉁이에 안묘당(安廟堂)을 지어 봉안해 오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경인란시에는 폭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별유사(別有司) 장봉섭이 삼태사 위판을 성곡동 장씨 광풍정(光風亭)에  이안(移安)하였다가 익년 8월13일에 능동 안동권씨 재사 보판각으로 이안하고 매년 춘추 향예를 봉행하여 오다가 1953년에 3성 후손이 중건 위원회를 발족하여 후손들의 성금으로 새로 중건하니 묘우 숭보당(崇報堂), 전사청(典祀廳), 동서재(東西齋), 안묘당(安廟堂), 주사(廚舍) 공사(工事)를 마치고 1958년 9월에 삼태사공 위판을 환안봉안(還安奉安)하고 고유(告由)하였다.
그 후 1963년에 보물각(寶物閣), 경모루(景慕樓)도 이어 준공하였다.

중건 후 수 십여년 간에 퇴락으로 삼성후손들이 걱정하여 오던 중 도유사(道有司) 김중한이 입재(入齎)하여 묘우 및 경내 건물 보수관계를 태사묘 관리위원들과 협의하여 관계기관과 절충한 결과 국가 보조금으로 1993년부터 3년에 걸쳐 묘우를 비롯하여 경내건물과 담장을 깨끗이 일신하였다.

이곳에는 부속건물로 보물각과 숭보당, 동서재, 경모루, 안묘당, 차전각 등이 있는데, 보물각에는 삼공신 중 누구의 것인지 분별할 수는 없지만 붉은 잔(朱漆托盞) 1개, 무늬비단(古絹布[花絹]) 1편, 비단(高絹布[無]) 6편, 관(冠) 1개, 가죽신 1켤레, 부채(布扇) 1개, 구리도장(銅印) 2개, 놋쇠합 1개, 옥관자(玉貫子) 2개, 허리띠(革帶) 4벌, 교지(敎旨) 1매, 동수저(銅匙箸) 1벌 등, 총 12종류에 22점(보물 제451호)이 잘 보존되어 있다. 숭보당 안에는 퇴계 선생이 지은 중건기문 등이 걸려있다. 묘정(廟廷)에는 삼공신 비가 세워져 있다.

안동 태사묘 사이트(http://3shrine.andong.com)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