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우당(退憂堂) 수흥(壽興)


자는 기지(起之), 호는 퇴우당(退憂堂). 할아버지는 우의정 상헌(尙憲)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광찬(光燦)이다. 영의정 수항(壽恒)의 형이다. 1648년(인조 26)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655년(효종 6) 춘당대(春塘臺) 문과에, 이듬해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했다. 부교리·도승지·호조판서 등을 두루 거치고, 1673년(현종 14) 우의정이 되었다. 이듬해 영의정으로 있을 때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제(服制) 문제에서 남인의 기년설(朞年說:만 1년)에 대해 대공설을 주장하다가 벼슬에서 쫓겨났다. 이해 8월 현종이 죽자 춘천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영중추부사가 되고 1688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다. 1689년 숙종이 소의장씨(昭儀張氏:희빈장씨)가 낳은 왕자 윤(昀:경종)을 세자에 책봉하려 하자 송시열과 함께 시기상조라고 반대했다. 숙종이 서인을 물리치고 남인에게 정권을 맡기자, 장기(長鬐)에 유배되어 이듬해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로 〈퇴우당집〉과 〈퇴우만필 退憂漫筆〉이 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仁祖(인조)26年(1648)司馬試(사마시)를 거친 金壽興(김수흥)은,孝宗(효종)6年(1655)年 30歲(세)에 春塘臺(춘당대) 文科(문과)에 오르고,이듬해 文科(문과) 重試(중시)에 올라 官職(관직)을 始作(시작)했다.春塘臺文科(춘당대문과)는 王室(왕실)에 慶事(경사)가 있을때,記念(기념)하여 昌慶宮(창경궁)春塘(춘당)에서 臨時(임시)로 치른 科擧試驗(과거시험)이었다.
여러 初任官職(초임관직)을 거친 金壽興(김수흥)은, 弘文館副校理(홍문관부교리)·司諫院大司諫(사간원대사간)·承政院都承旨(승정원승지)等(등),將來(장래)가 밝은 權府(권부)의 核心要職(핵심요직)을 順調(순조)롭게 歷任(역임)하고,顯宗(현종)7年(1666) 戶曺判書(호조판서)에 올랐다.이 무렵 같은 해 같이 文科重試(문과중시)에 함께 올랐던 그의 아우 金壽恒(김수항)도 大提學(대제학)을 거쳐 大臣(대신)으로,먼저 政丞(정승)에 오르는 等(등),그들 兄弟(형제)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朝廷大臣(조정대신)으로 政界(정계)에 크게 影響力(영향력)을 주는 位置(위치)에 있었다.
뒤에 곧 右議政(우의정)에 오른 金壽興(김수흥)은 摠護使(총호사)를 兼(겸)하다가,顯宗(현종)14年(1673) 判義禁府事(판의금부사)에 오르고,이듬해 4月 59歲(세)의 나이로 領議政(영의정)에 올랐다.그러나 그해 7月,孝宗妃(효종비)仁宣大妃(인선대비)가 죽음으로써 服喪(복상)을 얼마동안 해야 할 것인지를 두고 黨派間(당파간)에 熾熱(치열)한 政爭(정쟁)이 벌어졌다.

服喪期間(복상기간)을 9個月(개월)만 해야한다는 大功說(대공설)의 西人(서인)들과,1年間(년간)의 朞年說(기년설)을 主張(주장)한 南人(남인)들 間(간)에 피를 튀기는 政爭(정쟁)이 벌어져,結局(결국) 南人(남인)들의 朞年說(기년설)이 採擇(채택)되어 南人派(남인파)가 勝利(승리)하니, 西人便(서인편)에 섰던 金壽興(김수흥)은 敗(패)하여,하마터면 먼 곳으로 歸養(귀양)까지 갈 뻔 했다가 겨우 자리만 保全(보전)하게 되었는데 힘을 잃고 말았다.그해 8月,顯宗(현종)이 昇遐(승하)하고 肅宗(숙종)이 登極(등극)하자,執權派(집권파) 南人(남인)들이 새 王(왕)의 登極(등극)을 契機(계기)로, 反對派(반대파)였던 金壽興(김수흥)을 끈질기게 물어 뜯으니,그는 結局(결구) 견디질 못해 官職(관직)을 빼앗긴 채 江原道(강원도)春川(춘천)으로 歸養9귀양)을 가야 했다.이때 그 자리는 前領議政(전영의정)許積(허적)이 다시 오르고,左議政(좌의정)에는 金壽興(김수흥)의 아우 壽恒(수항)이 앉았다.그러나 이듬해 金壽興(김수흥)은 歸養(귀향)에서 풀려  楊州(양주)에 隱居(은거)하다가,肅宗(숙종)6年(1680), 이른바 庚申大黜陟(경신대출척)이라는 큰 政變(정변)이 벌어져 西人(서인)들이再執權(재집권)하니,金壽興(김수흥)은 領中樞府事(영중추부사)로 다시 權部(권부)에 들어왔다가,肅宗(숙종)14年(1688) 7月 두번째 領議政(영의정)에 올랐다. 庚申大黜陟(경신대출척)은 1680年 卽(즉)庚申年(경신년)에 許積(허적)等(등)의 南人一派(남인일파)가,西人(서인)들이 誣告(무고)하여 일으킨 許積(허적)의 아들 許堅(허견)의 逆謀事件(역모사건)에 몰려,大擧肅淸(대거숙청)된 어처구니 없는 事件(사건)이었다.그러나 政變(정변)은 남은 씨앗 때문에 꼬리를 물고 反復 (반복)되는 셈이라,肅宗(숙종)16年(1689) 己巳年(기사년) 2月에 일어난 己巳換局(기사환국)으로,西人政權(서인정권)이 무너지고 南人(남인)들이 다시 權力(권력)을 잡으니,金壽興(김수흥)은 또 削奪官職(삭탈관직)當(당)해 長機(장기)에 流配(유배)되고 말았다. 때를 같이하여 앞서 領議政(영의정)을 거듭했던 金壽恒(김수항)은 死藥(사약)을 받아 목숨까지 잃었다.己賜換局(기사환국)은 肅宗(숙종)이 後宮(후궁) 張禧嬪(장희빈)의 아들을 世子(세자)로 삼으려 하자,宋時烈(송시열)을 主軸(주축)으로하는 西人(서인)들이 反對(반대)하였다. 이에 肅宗(숙종)의 뜻을 받들던 南人(남인)들이 들고 일어나 西人(서인)들을 攻駁(공박)하니,肅宗(숙종)이 南人便(남인편)을 들어 西人(서인)의 中心人物(중심인물)인 左議政(좌의정)宋時烈(송시열)을 流配(유배)시켰다가 死藥(사약)을 내려 죽이고,金壽興(김수흥)等(등)西人政權(서인정권)을 말려 버린 부질없고 寒心(한심)스런 政變(정변)이었다.金壽興(김수흥)은 流配(유배)된 그 이듬해,罪人(죄인)된 몸으로 65歲(세) 나이에 그만 世上(세상)을 등졌다.그는 大學者(대학자) 宋時烈(송시열)을 마음속의 스승으로 여겨 尊敬(존경)하며, <朱子大全(주자대전)>·<語類(어류)> 等(등)朱子學(주자학)에 關(관)한 宋時烈(송시열)의 著述(저술)을 즐겨 探讀(탐독)하며 經倫(경륜)을 쌓았다. 그는 섬겼던 歷代帝王(역대제왕)들에게 時弊疏(시폐소)를 올려,百姓(백성)들의 어려움을 풀어 주고 民生(민생)을 보살피는 政策(정책)을 펼치려 애를 썼고,百姓(백성)을 爲(위)해 고쳐야 할 政治(정치)의 革新(혁신)을 여러번 國王(국왕)에게 建議(건의)하였다.그러나 王(왕)을 감싸고 도는 大臣(대신)들의 밤낮 없는 黨派(당파)싸움에 묻혀 番番(번번)히 그의 政治的(정치적) 信念(신념)은 빛을 보지 못했다.金壽興(김수흥)의 家門(가문)은 仁祖以後(인조이후) 當代(당대)의 名門(명문)이었다.그의 曾祖父(증조부)金克孝(김극효)는 敦寧府都正(돈영부도정)으로 王室宗親府(왕실종친부)核心人物(핵심인물)이었고,左議政(좌의정)이던 그의 할아버지 金尙憲(김상헌)의 兄(형)인 金尙容(김상용)은 吏曺判書(이조판서)에 올랐다가 丙子胡亂(병자호란)때 王族(왕족)을 强化(강화)로 避亂(피란)시키고,江華城(강화성)이 陷落(함락)되자 火藥(화약)더미에 불을 질러 自決(자결),집안을 忠臣烈士家門(충신열사가문)으로 빛냈는데,이들 兄弟(형제)는 左議政(좌의정)鄭惟吉(정유길)의 外孫(외손)이었다. 오늘날의 京畿道(경기도) 南楊州市(남양주시)瓦阜邑(와부읍) 栗石里(율석리)에 夫人(부인) 南原尹氏(남원윤씨)와 合葬(합장)으로 된 金壽興(김수흥)의 墓所(묘소)가있고,肅宗(숙종)20年(1694)罪(죄)가 풀려 文翼公(문익공)으로 諡號(시호)를 받았으며,조카인 性理學者(성리학자) 金昌翕(김창흡)이 墓誌銘(묘지명)을 썼다. 金壽興(김수흥)의 아들에 昌說(창설)이 있어 아래로 孫子(손자)利謙(이겸)·貞謙(정겸)이 났다.

 


                   문익공 수흥묘소
 
                포항장기 퇴우당 유적비
 
 
 
                 문익공 간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