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진(宗鎭)


충남 홍성군 구항면 내현리(忠南 洪城郡 龜項面 內峴里)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시야(是也). 부친은 참봉을 지낸 영규(泳圭)이며청송 심씨 사이에서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10세 때에 재당숙(學圭)에게 출계하니 양모는 은진 송씨이다.
 호(號)는 시야(是也)이다.

선생은 8세 때에 서당에 입학하여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13세 된 1913년 봄에는 남양 홍씨 순극(南陽洪氏 淳競)의 2녀인 16세의 종표(宗杓)와 결혼하였다. 1919년 3월 전국적인 반일 만세시위가 퍼질 무렵 19세의 선생은 홍성군내 시위대의 선봉에 서다가 체포되었다. 옥중에서 갖은 고난을 겪었지만 6월말 미성년이란 이유로 석방되었다. 귀가하자마자 선생은 상경을 결심하고 서울 중동학교(中東學校) 중학속성과에 입학하였다.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질을 기르기 위해 상경한 만큼 선생은 교내외 교우관계를 넓히는 데 진력하였다. 시내 각 학교에 연락망을 구축하고 비밀출판 등의 활동을 전개하자 일본경찰의 포위망이 점차 좁혀 들어왔다.

때마침 선생의 친척 형님뻘인 연진(淵鎭)이 중국 봉천(奉天 현재 심양)으로 잠입하여 국내와의 연락책임을 맡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선생은 중국으로의 탈출을 결심하게 되었다. 1920년 4월 서울을 출발한 선생은 봉천 교외에서 연진을 만났다. 선생은 국내로의 무기반입 계획이 발각되자 북경의 이회영을 찾아가게 되었다. 도착 후부터 선생은 심웅(沈雄)이란 이름으로 성명을 바꾸고 북경에서 다양한 원로 독립지사를 만났다. 그 중에는 홍성 의병의 노장인 이천민(李天民 일명 世永·세영)을 비롯해 조성환(曺成煥)․이광(李光)․박용만(朴容萬) 등 중장년층과 최용덕(崔用德)․박숭병(朴崇秉) 등 청년층도 있었다. 이들의 다양한 경험담을 들은 선생은 일제와 대항할 수 있는 군사적 학식과 훈련을 쌓은 유능한 지도자가 되어야겠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이회영과 상의한 끝에 상해의 신규식을 소개받은 선생은 1921년 1월말 상해로 출발하였다. 신규식은 손문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한인들의 무관학교 입교에 적극적이었는데 운남성독군(雲南省督軍) 당계효(唐繼堯)에게 간곡한 편지를 써주어 선생이 운남군관학교에 입학하도록 주선하였다. 운남군관학교는 1907년 8월 귀주성(貴州省)에 주둔 중인 청조 신군(新軍) 19진(鎭) 소속 군사간부 양성을 목적으로 운남육군강무당으로 개교한 이래 ‘민주혁명 전사’를 양성하는 신식 군사학교를 표방하였다. 1912년 운남강무학교로 개칭되었고 19기에 걸쳐 약 5천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는데 신규식은 1916년 이범석(李範奭)․배달무(裵達武) 등을 특별 입학시킨데 이어 15기생에 많은 한인들을 입교시켰다. 16기생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동북항일유격대의 창시자인 양림(楊林)이 있고 17기생에 동북항일연군 참모장을 지낸 최용건(崔庸健) 등이 있다. 이처럼 명문 사관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당계효는 그의 부관을 동행하도록 배려하였다.

1921년 2월말 상해에서 광동행 선편에 올라 탄 두 사람은 안남국(安南國 베트남) 해당항(海防港)까지 배를 갈아탄 후 진월(瑱越) 철도편으로 하내(河內)를 경유하여 운남성 수도인 곤명(昆明)까지 가는 긴 여정을 이어갔다. 곤명역에 도착한 때는 그 해 4월 2일 밤이었다. 운남성독군 당계효와 교장의 특별한 지도와 관심으로 운남군관학교 교도대에 편입된 선생은 개인교수와 같은 특별지도대장을 배속 받아 언어와 문장을 지도 받았다. 불과 4․5주 만에 수강과 훈련에 지장이 없을 만큼 되니 동료들이나 지도 대장들의 칭찬이 대단하였다. 입대 후 1년이 지난 사이 완전한 중국 청년으로 행세할 수 있었던 선생은 2년 후에는 주로 도서관을 찾아 수많은 양서를 탐독하였다.

교도대 2년 과정을 마친 선생은 1923년 봄 운남강무당(雲南講武堂 통칭 군관학교)에 16기생으로 입학하여 정식 사관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때 동기생인 대전 출신 김노원(金魯源)을 만났다. 두 사람은 서로를 격려하면서 훈련을 거듭해 마침내 1925년 4월 강무당을 졸업하게 되었다. 함께 일하자는 당계효 독군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만주로 귀환하고자 한 선생은 김노원과 함께 곤명을 떠나 광동을 거쳐 상해로 나갔다. 그곳에서 임시정부 요인들을 비롯해 류자명 등 의열단계열 청년들 이을규․이정규․정화암 등과도 접촉하였다. 1926년 4월말 상해를 떠난 선생과 김노원은 중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남경(南京)-한구(漢口)-무창(武昌) 등을 여행하였다. 이 와중에 중국 국공내전에 휩싸여 훈련관이 되기도 하며 민족차별과 배고픔 등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여비 부족으로 부득이 홀로 만주로 떠나게 된 선생은 북경-천진에 들러 이회영을 찾아가 수일에 걸쳐 사상담화를 나누게 되었다. 노혁명가와 담화를 통해 선생은 아나키스트가 어떤 사상과 행동을 가져야 하는지 자유연합주의가 왜 독립운동에 가장 적절한 이론인지 향후 건설될 독립한국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등을 가슴으로 새기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선생은 천진역을 떠나 중동선 북만주로 들어가게 되었다.

1927년 10월 하순 목단강역에서 족형인 백야 김좌진을 만난 선생은 독립전쟁을 위해 둔전양성의 계획을 서둘렀다. 선생은 첫째 만주전역을 수개구역으로 나눌 것 둘째 지방 실정의 조사파악 셋째 교포조직화와 지도훈련 등의 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를 위해 선생은 우선 신민부 영향 하에 있는 각 지방을 비롯해 북간도 일대를 답사한 다음 계획을 구체화하려 하였다. 선생의 순방지역은 해림(海林)을 출발해 목릉(穆稜)-밀산(密山)을 거쳐 영안(寧安)-오상(五常)-액목(額穆)을 경과하고 이어 돈화(敦化)까지 왔다가 백두산 북방인 안도(安圖)-장백(長白)-무송(撫松)을 순방한 후 북간도인 연길(延吉)-왕청(汪淸) 등 간도 전역을 돌아오는 것이다.

신민부와 김좌진의 활동 보도 기사(《동아일보》1928년 11월 3일자). 지면 오른쪽 굵은 한자로 쓰인 제목에 ‘신민부 수령 김좌진. 부하 3명과 잠입. ◊남조선 일대 경계 더욱 엄중◊ 각도경찰부 총활동’이라고 나와있다. 이 기사를 통해 김종진 선생이 신민부에 참여하고 있을 때의 신민부와 김좌진의 위상과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1928년 1월초 여정에 올라 약 8개월 동안 만주 전역을 순방한 선생은 만주개척의 선봉대인 교민들의 생활실태를 조사하면서 김좌진의 대변자로서 그들을 위무하였다. 귀환 후 선생은 교민들의 참담한 생활실태는 물론 그 배후에 중국 토착지주와 자본가 일제와 국제공산도당의 위협이 있음을 보고하였다. 또한 이에 대한 대책으로 일제에 대한 항전대책과 대공산당 행동통일 및 독립운동단체 상호간의 협동 등을 제안하였다.

이러한 ‘만주에서의 독립운동계획안’은 곧 신민부 개편으로 이어졌는데 사상적 통일을 기하기 위해 1929년 7월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게 되었다. 연맹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인간의 존엄과 개인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하는 무지배 사회의 구현을 기한다.
2. 사회적으로 모든 사람은 평등하므로 각인은 자유 창의 또는 상호부조적 자유합작으로써 각인의 자유발전을 기한다.
3. 각인은 능력껏 생산에 근로를 바치며 각인의 수요에 응하여 소비하는 경제질서의 확립을 기한다.

이러한 강령 아래 모인 동지들은 이준근(李俊根)․이강훈(李康勳)․이붕해(李鵬海)․이덕재(李德載)․이달(李達)․김야봉(金野蓬)․김야운(金野雲)․엄형순(嚴亨淳) 등이다. 그리고 신민부 개편안을 제출해 주요 간부회의를 개최하고 7월 21일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한족총연합회의 조직체계는 먼저 각 지역에 농무협회를 조직하고 이들을 자유로 연합하는 방식이었다. 연합회가 신민부의 후신이긴 하지만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주체가 되어 조직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본부는 영안현 산시역(山市驛) 앞에 두었다.

재만동포들의 자주자치적 협동조직체를 표방한 한족총연합회는 위원장에 김좌진 부위원장에 권화산이 추대되었다. 이 외에 농무 및 조직선전에 선생 교육 이을규 군사 이붕해 등 측근 동지들이 각각 차장으로 임명되어 조직을 운영하였다. 한족총연합회는 과거 단체들처럼 권력이나 위세를 부리지 않고 동포들의 토지교섭은 물론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보호해주니 각 지역으로부터 호응을 얻었다. 조직정비가 완료되면서 한족총연합회는 조직과 간부를 훈련시키고자 북만중학(北滿中學)을 빨리 운영하고자 하였다. 학교 설립을 통해 경제와 교육이 유기적인 관계를 맺는 안정적인 농촌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한족총연합회의 발전에 대해 공산주의자들은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한번은 농민들을 모아놓고 양자간의 공개토론회를 열었는데 공산주의자들의 만행을 규탄하자 청중들이 환호하였다. 이러한 극단적인 대응으로 서로의 감정이 극도로 악화되자 공산주의자들은 암살이란 극단적인 방법을 썼다. 불행히도 그 첫 번째 대상자가 바로 백야 김좌진이었다. 1930년 1월 20일 오후 4시경 김좌진은 자신이 만든 희망의 보금자리인 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인 박상실이 쏜 흉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무렵 다행히 북경에서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국내에 잠입했던 아나키스트 신현상(申鉉商)이 그해 4월 충남 예산의 친일은행인 호서은행에서 탈취한 막대한 운동자금을 구해 왔으니 전체회의에 참석하라는 소식이었다. 이에 선생이 이을규와 함께 만주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중국 각지에서 모여 열린 회의에서 노혁명가 이회영은 다시금 만주운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그에 총력을 기울일 것을 당부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중국 경찰을 앞세워 숙소를 급습함으로써 중요하게 쓰일 운동자금을 빼앗기고 말았던 것이다. 이 자금을 바탕으로 세웠던 계획 특히 만주에서의 운동계획 또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더욱이 이을규가 천진에서 기선을 탔다가 선상에서 일제 관헌에게 피체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이회영과 백정기 등이 논의를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천진 시내에 있는 중․일 합작은행인 정실은호(正實銀號)를 털자는 것이었다. 이 습격사건에 성공하여 1930년 9월 경 정화암․백정기․김지강․장기준․양여주․이규숙 등 15명이 만주를 향해 떠났다. 원군을 맞이한 한족총연합회는 내부를 정돈하고 다시 본격적인 사업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농민 위에 있지 않고 농민들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괴로움을 나누며 함께 사업을 전개하는 방식을 취했으므로 금방 농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한족총연합회는 모든 것을 교민들의 자치로 결정하기로 하고 일 년에 한 번씩 각 지역 대표자 총회를 열어 모든 중요한 사항들을 결정하였다.

이렇듯 한인의 단합과 생활안정을 위해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던 선생은 1931년 7월 11일 해림역 근처에 있는 조영원(趙永元)의 집에 갔다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어디론지 납치되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