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화(鄭靖和)


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 투사들과 생사 존몰(存沒)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 없음을 사 주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선생의 회고록 [녹두꽃]의 서문 중에서-

독립운동은 총칼로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남자만 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자신의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조국광복과 민족독립을 쟁취하려는 것이 독립운동이다. 그리하여 “힘이 있는 자는 힘으로 돈이 있는 자는 돈으로 정성이 있는 자는 정성으로” 독립운동은 전개되었다. 여성 독립운동가들도 마찬가지였다. 남자현여사는 만주 벌판을 누비며 일본군을 무찔렀고 유관순열사는 감옥에서도 독립만세를 절규하다가 쓰러졌다. 이 밖에도 수많은 여성들이 독립운동 전선에서 민족독립을 갈구하며 산화하였던 것이다.

선생도 그런 여성 독립운동가 가운데 한 분이었다. 하지만 선생의 운동 방식은 달랐다. 직접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말없이 정성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것이었다. 물론 선생도 사지를 넘나들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고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중경) 대한애국부인회등의 단체에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선생의 주된 활동 영역은 아니었다. 임시정부의 안주인 이것이 바로 선생의 본분이나 다름없었다. 1920년 상해로 망명하여 1946년 귀국하기까지 선생은 망명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임정 요인들의 뒷바라지에 바쳤다. 백범 김구는 물론 석오 이동녕(李東寧) 성재 이시영(李始榮) 등 임정 요인들 가운데 선생이 지어준 밥을 먹지 않은 분이 없었고 임정의 가재도구 가운데 선생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임정 요인들의 고달픈 망명생활은 선생이 있음으로써 위안이 되었고 나아가 27년간이라는 그 유례를 찾기 힘든 임시정부의 역사도 선생이 있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선생은 1900년 8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수원 유수를 지낸 정주영(鄭周永)과 이인화 사이의 2남 4녀 가운데 셋째 딸이었다. 부친은 충남 예산에 많은 토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은 유복한 가정에서 부모의 귀여움뿐 아니라 두 오라버니와 언니들의 총애를 받으며 자랐다. 부친의 완고한 반대로 어깨너머로밖에 할 수 없었던 공부였지만 어려서 한학을 익혀 신문 정도는 불편 없이 읽을 정도였다. 선생 자신도 “나는 원래 둔한 편은 아니어서 여섯 살 때 이미 두 살 위의 작은 오라버니를 따라 몰래 서당에 다니면서 천자문을 떼었고 시집가기 약 1년 전부터는 오라버니를 가르치던 선생님으로부터 다시 글을 배울 기회를 얻어 [소학]까지는 떼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문 정도를 읽는 데는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은 11살이 된 1910년 가을 김가진(金嘉鎭)의 3남인 동갑내기 신랑 김의한(金毅漢)과 혼인하였다. 김의한과 결혼하면서 선생은 세상 물정에 눈뜨기 시작했다. 그것은 개화파 집안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남편 김의한의 영향이 컸다. 김의한은 1914년 매동(梅洞)보통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운 뒤 1917년부터 중동(中東)학교에서 수학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제1차 세계대전 종전과 더불어 많은 나라들이 독립을 얻었으며 우리에게도 독립의 기회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등의 이야기를 선생에게 자주 해주었다.즉 선생에게 국제 정세를 알려주며 민족의식을 일깨워준 것이다. 특히 1919년 3․1운동의 발발과 그 와중에서 대동단총재로 추대된 시아버지 김가진과 남편 김의한이 상해로 망명한 사건은 선생의 생애에서 하나의 큰 전기였다. 이를 계기로 선생 또한 상해 망명과 독립운동 투신을 결심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1920년 1월 초순 서울역에서 의주행 열차를 타고 상해로 망명길에 올랐던 것이다.

서울에서 의주 봉천 천진 남경 상해까지 연이어 열차를 갈아타면서 꼬박 열흘 이상을 달려 상해에 닿은 것은 1월 중순의 어느 이른 아침이었다. 그러나 상해에 도착하여 재회의 기쁨도 맛보기 전에 선생은 다시 국내로 밀파되었다. 당시 임정 법무총장으로 있던 예관 신규식(申圭植)과 시아버님 김가진의 지시에 따라 선생은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1920년 3월 초순 상해를 출발하여 국내로 향했다. 국내 잠입 경로는 1919년 7월 시행되어 국내외에 가동되고 있던 임시정부의 비밀 지방 행정 및 연락 조직인 연통제를 따랐다.

상해에서 만주 안동현까지는 이륭양행(怡隆洋行)의 배편을 이용하였다. 당시 안동에는 우강 최석순이 임정의 연락책으로 상주하고 있었다. 그는 일경으로 위장해 있으면서독립운동가들의 내왕을 도왔는데 선생은 그의 누이동생을 가장해압록강을 건너 신의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 도착하는 즉시 선생은 서울역 건너편 세브란스 병원 관사에 있는 신필호를 찾아갔다. 서울에서 가장 유능한 젊은 산부인과 의사였던 신필호는 신규식의 장조카였기 때문에 그 집을 거점으로 독립운동 자금 모집에 나선 것이다.

선생은 20일 가량 서울에 있으면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뒤 그 돈을 전대 깊숙이 간직한 채 4월 초상해로 귀환하였다. 첫 번째 독립운동 자금 조달 임무를 완수한 것이다. 이어1921년 늦은 봄 두 번째로 국내에 밀파됐는데 그 출발 동기 자체가 임정의 독립운동 자금 모금에 있었다. 선생은 국내에 들어와 곧바로 예산의 친정 집으로 내려가 친정 아버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그런 다음 개성을 거쳐 우사 김규식의 이질(姨姪)인 서재현을 대동하고 상해로 귀환함으로써 두 번째 임무도 완수하였던 것이다.

이듬해 6월 중순 선생은 세 번째로 국내로 밀파되었다. 이번 국내 잠입의 목적도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것이었다. 상해에서 배편으로 산동반도의 청도를 거쳐 안동현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동행인 이욱(李昱)이 워낙 자신 있다고 장담하는 바람에 열차가 아니라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기로 했다. 그러다가 선생 일행은 압록강 철교 위에서 일경에게 체포되었고 결국 신의주 경찰서로 끌려 가 이틀 동안 심문을 받은 끝에 신분이 탄로 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서울 종로경찰서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 나왔다. 그러던 중 시아버지 김가진의 부음을 받았다. 일흔이 넘은 나이에 조국 광복에 투신하고자 상해로 망명하였던 김가진이 1922년 7월 4일 불귀의 몸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 해 7월 장례식 참석을 명분으로 시동생 김용한을 대동하고 다시 상해로 갔던 것이다.


 
 
 

선생은 그 해 10월 다시 한번 네 번째로 국내로 잠입하여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이듬해 7월 상해로 귀환하였다. 1924년 12월에도 선생은 다섯 번째로 국내로 잠입한 뒤 이듬해 6월까지 약 6개월간 주로 예산의 친정 집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이 시기 임정은 그야말로 간판만 있는 형세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과 대립으로 임정의 위상은 크게 손상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내외 동포들의 임정에 대한 재정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때문에 임정은 1925년 3월 이승만대통령을 탄핵 사면하고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중심제 정부를 내각책임제 정부인 국무령제로 바꾸었다. 그러나 지도급 인사들의 외면으로 정부 조각조차 불가능한 형편이었다.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1926년 말 국무령에 취임한 김구는 집단지도체제 형태인 국무위원제로 헌법을 개정하여 근근이 임정의 명목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같이 어려운 시기에 선생은 임정 요인들의 수발을 들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김구도 여기저기 다니다가 배가 출출할 때면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하면서 찾아오곤 하였다. 가장 어렵고 배고팠던 시기를 선생은 임정 요인들과 같이 보냈던 것이다.

그리고 서른 살이 되던 해인 1929년 7월 선생은 10년 전 망명길에 오른 후 여섯 번째로 다시 고국 땅을 밟았고 이후 1년 6개월간 국내에서 체류하기도 하였다. 1931년 초 선생은 다시 상해로 망명하면서 독립이 되기 전에는 귀국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선생이 상해로 망명한 직후부터 주변 정세가 변화하였고 독립운동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다. 1931년 연이어 발생한 ‘만보산 사건’과 ‘만주사변’이 주된 요인이었다. 7월 길림성 만보산에서 한·중 농민간에 수로문제를 둘러싸고 마찰이 일어났을 때 일제의 이간책과 악선전으로 국내 각 도시에서 중국인들을 습격 살해하는 일이 빈발하였다.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중국인들이 귀국하였고 그로 인해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증오와 적대행위가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 감행된 일제의 만주침략도 독립운동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여 점령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인적 물적 기반에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부 부일배(附日輩)들이 일제의 힘을 배경으로 중국인들에게 여러 가지 악행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중국의 반한(反韓) 감정이 고조됨에 따라 임시정부의 활동이 어렵게 된 것이다. 중국 영토 안에서 활동하고 있던 임시정부로서는 중국과의 관계나 한·중 양 민족의 관계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들 사변 이후 중국인들이 한인들을 적대시하고 심지어 임시정부가 있는 상해의 길거리에서도 한·중 양민간에 충돌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특무대를 조직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리하여 1931년 말 임정의 특무조직으로 한인애국단이 조직되었고 김구가 그 단장을 맡았던 것이다.

1932년 1월 이봉창의거와 4월 윤봉길의거는 한인애국단이 이루어낸 쾌거였다. 이들 의거로 말미암아 한·중 양민간의 갈등과 대립은 일거에 불식되었고 항일투쟁의 연대 고리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봉창 윤봉길 의거는 여러 해 동안 상해에 있는 한국 독립운동자들을 정치적 망명객으로 취급하여 보호해 주었던 프랑스 조계 당국의 태도를 변화시키고 말았다. 그것은 이봉창 의거를 계기로 상해사변이 발생하여 일본군이 상해를 점령한 상태에서 윤봉길 의거가 결행되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의 승전 축하 행사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버린 윤봉길 의거는 이제 더 이상 프랑스 조계 당국이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 독립운동자들을 보호할 수 없게 하였다. 그리하여 프랑스 조계 당국은 한국 독립운동자들에게 즉시 상해를 탈출하라고 통고하였던 것이다.

5월 1일 선생 가족은 상해를 떠나 기차 편으로 가흥으로 피신하였다. 여기서도 선생은 석오 이동녕 등 임정요인들을 모시기에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중국 정부와 교섭을 맡고 있던 박찬익의 주선으로 한때 신강성 성장을 지낸 임긍(林兢)이란 사람을 소개받았다. 임긍은 선생의 남편인 김의한을 전원공서에 취직시켰는데 그것은 중앙정부에서 파견하는 지방 행정 관리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가족은 1934년 봄 임지인 강서성 풍성현(豊城縣)에 도착하였다. 여기에서 선생의 가족은 1년쯤 있다가 다시 무령현(武寧縣)으로 이주하여 3년 가까이 생활하였다. 이 시기 선생은 1935년 11월 임시정부 여당으로 창당된 한국국민당에 가담하였다. “내가 독립운동 단체에 적(籍)을 두게 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라는 말처럼 선생이 공식적으로 처음 가입한 단체였다.

1931년 9월 일제가 이른바 만주사변과 1932년 1월 상해사변을 도발하여 중국 대륙침략을 감행하자 독립운동계에서는 항일투쟁 역량을 결집하기 위해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의열단 한국광복동지회 등의 대표들이 협의하여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결성하였던 것이다. 이 동맹은 ‘혁명역량의 집중과 지도의 통일로써 대일전선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고 ‘민중의 기초 위에서의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투쟁노선으로 설정하여 대일항전의 구심체적 역할을 담당하여 갔다. 나아가 이 동맹은 민족통일전선체로서 1935년 7월 민족혁명당을 결성하고 임시정부폐지론을 제기하고 있었다.

이에 대항하여 임시정부사수를 주장하던 김구 이동녕 조성환 조완구등은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기 위하여 1935년 11월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게 되었다. 한국국민당은 “적의 모든 세력을 박멸하고 완전한 민주공화국을 건설하여 위로는 조선의 광휘를 빛내고 밑으로는 자손만대의 영예를 발전시킴으로써 세계민족과 함께 공존공영을 도모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민족 정당이었다. 또한 한국국민당은 임시정부의 여당이자 독립운동 정당으로써 아래의 행동강령을 천명하였다.

1. 국가주권 광복의 혁명적 의식을 국민에게 고취 환기하여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 집결할 것.
2. 엄밀한 조직 하에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적으로 진행할 것.
3. 우리의 광복운동을 우호적으로 원조하는 국가 및 민족과 절실히 연락할 것.
4.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하고 국민의 생활권을 평등하게 할 것.
5. 독립운동에 대한 사이비 불순적 이론과 행동을 배격할 것.
6. 임시정부를 옹호 진전시킬 것.

1938년 2월 선생의 가족은 강서성 무령을 떠나 호남성 장사로 가서 임시정부와 다시 합류하였다. 이로부터 임시정부의 안주인으로서 선생의 역할은 본격화되었다. 이 시기 일제는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蘆溝橋事件)을 기화로 중일전쟁을 도발하고 ‘거점(據點)과 병참선(兵站線)’으로 이루어지는 대륙 침략작전으로 중국 전역을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정세 변화에 따라 독립운동단체들은 크게 두 갈래로 체제를 정비하여 본격적인 대일항전을 준비하여 갔다. 하나는 1937년 8월 한국국민당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중심이 된 우익 민족운동계열의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韓國光復運動團體聯合會) 결성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같은 해 11월 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등이 중심이 된 좌익 민족운동계열의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 결성이었다.

이 같은 좌우익의 분열은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었다. 때문에 임정을 중심으로 하는 한국국민당을 비롯한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우익 3당의 통합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통합논의를 위해 우익 3당의 대표들이 1938년 5월 6일 남목청(楠木廳)에 모여 회의를 진행하던 중 비극적 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운환(李雲煥)이라는 청년이 3당 대표들에게 권총을 발사한 것이다. 백범이 맨 먼저 가슴에 총을 맞았고 춘교 유동열 백산 이청천 묵관 현익철 등이 잇따라 총을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그로 인해 현익철은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절명하였고 백범과 춘교는 상아의원에 입원하여 치료받게 되었다. 이때에도 이들의 뒷바라지는 선생의 몫이었다.

특히 1938년 9월 초 광주시에 연락처만 남겨놓은 채 대부분의 임정 식구들이 그곳에서 서쪽으로 약 25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불산으로 옮겨갔는데 이때부터 임정의 안살림은 선생이 도맡게 되었다. 이후 광서성 유주와 귀주성 귀양을 거쳐 사천성 남쪽 끝에 있는 기강현에 도착한 1939년 4월말에 이르러서도 선생의 안주인 역할은 계속되었다.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1940년 3월 임정의 맏어른이자 영도자였던 이동녕이 사천성 기강현에 있는 임정 건물 2층 침소에서 71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도 마지막까지 그를 간호하며 임종을 지킨 분이 바로 선생이었다.

한편 중경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조직과 체제를 확대 강화하면서 독립운동의 활동기반을 갖추어 갔다. 1940년 5월 민족진영의 3당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중경)을 창당하고 9월에는 군사조직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그해 10월에는 개헌을 단행하여 주석을 중심으로 하는 강력한 단일지도체제를 확립함으로써 당(한국독립당) 정(임시정부) 군(한국광복군)의 체제를 갖추었다. 이로써 독립운동의 중추기관으로서 임시정부의 위상이 크게 제고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주도해 갔던 것이다. 이때 선생 또한 남편 김의한과 더불어 한국독립당의 창립 당원으로 활약하였다. 같은 해 6월 한국독립당의 여성 조직으로 한국여성동맹이 기강에서 창립될 때 선생은 간사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나아가 임정의 안주인으로 1941년 1월 기강에서 중경 근처의 토교로 임정 가족들이 이사할 때 이를 주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특히 1940년 9월 중경으로 옮겨오면서 민족의 모든 역량을 대일 항전에 결집하기 위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여 가자 1943년 2월 각 정파의 부인들 또한 중경에서 한국애국부인회 재건대회를 개최하였다. 여성차원에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때 선생은 훈련부 주임 김순애는 주석 박순희는 부주석 그밖에 최소정ㆍ김운택ㆍ연미당ㆍ강영파ㆍ권기옥 등이 각 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선생이 집행부의 일원을 맡은 재건 한국애국부인회는 “국내외 부녀는 총단결하여 전민족해방운동과 남녀평등이 실현되는 민주주의 신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여 분투하자”는 강령을 선포하였다. 그런 다음 각종 매체를 통해 국내외 동포 여성들에게 민족적 각성을 촉구하며 독립운동 참여를 호소하고 의연금품을 모아 무력항쟁을 준비하는 광복군을 위문하는 등 독립운동 지원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 갔다. 아울러 연합군측으로부터 인계 받은 동포여성들을 교육하여 독립운동에 참여케 하고 해외 각지의 한인 여성단체들과 긴밀한 연계를 가지면서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그러던 중 일제의 패망으로 선생은 8․15광복을 토교에서 맞이하였다. 광복 후 임정 요인들은 11월 5일 중경을 출발하여 상해에서 20여일 지체한 후 11월 23일과 12월 1일 두 차례에 걸쳐 환국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임정 요인들이 중경을 떠난 뒤에도 토교에 남아 12월 한 달 동안 뒤처리를 마치고 이듬해 1월 하순 상해로 갔다. 그 뒤 5월 9일 선생 일행은 상해 부두에서 미군이 제공한 LST라는 수송선을 타고 사흘 만에 부산에 도착함으로써 그리던 조국 땅을 밟았던 것이다. 환국 이후 선생은 일체의 정치 활동을 피하였다. 하지만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민족국가 수립 운동을 전개하던 김구와 한국독립당의 신(新)국가 건설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남한 단독 정부 수립 이후 부통령에 취임한 성재 이시영이 선생을 사정기관인 감찰위원회의 감찰위원으로 추천하였지만 취임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