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봉(叅奉)  시좌(時佐)


태어나면서 남다른 점이 있었다. 정성스러운 효성을 하늘로부터 타고 나왔다.
어머니 양씨(楊氏)를 받들 때는 순종하여 어김이 없었다.
집이 가난하여 그 아우인 시우(時雨)ㆍ 시량(時良)과 함께 몸소 사냥하고 고기를 잡았다.
비록 한서풍우(寒署風雨)에도 괴로움을 꺼리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공양함에 일찍이 넉넉하게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눕게되자 다년 동안 빗질을 하지 않고 자꾸만 긁어대어 부스름이 되었다.
시좌(時佐)가 항상 자기의 머리카락을 섞이게 하여 이가 옮겨 가도록 했다.
또 등에 종기가 난 것이 두려워 주야로 고름을 입으로 빨아 내었는데 곧 신통한 효과를 보았다.
어머니가 천수(天壽)를 누리고 죽자 시좌는 여막에서 살았는데 염장채과(鹽醬菜果)를 먹지 않고 죽만 먹으며
3년 동안 한번도 집으로 내려간 적이 없었다. 애통함이 예에 지나쳤다.
하루는 대풍(大風)을 만나 여막에서 불이 났다. 불이 빈청(殯廳)에 까지 번졌는데
시좌가 영구를 껴안고 통곡하며 머리를 바닥에 두드리자 이전의 불이 금새 저절로 꺼졌다.
향리의 사람들이 모두 효성에 하늘이 감동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침 저녁으로 사당을 살피기를 평생토록 한결같이 했다.
무덤을 찾아 왕래했는데 하루도 그만두는 날이 없었다. 식망이 되면 제물을 마련하여 반드시 무덤으로 올라가 제를 올렸다.
어버이를 일념으로 사모하기를 몸이 마치도록 줄어들지 않았다.
국기(國忌)를 당하면 반드시 재계(齋戒)하고 소식을 행하기를 부모의 기일(忌日)에 하는 것과 같이 했다.
국상(國喪)에는 반드시 심상(心喪) 3년을 마치 부모의 상을 만난 것같이 하였다.
그 효제충신(孝悌忠信)한 행실과 염근공검(廉謹恭儉)한 덕(德)에 사람들이 다 탄복하였다.
가정 경자년에 당시의 수령과 방백(方伯)들이 다투어 이 사실을 조정에 알려서 정려가 내려졌다.
문이 풍산읍 상리(上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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