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와(鳳窩)  제균(濟均)


자는 우여(禹如). 호는 봉와(鳳窩). 아버지는 김병덕(金炳德)이고 어머니는 김해 김씨(金海 金氏)이다.

김제균(金濟均)[1796~1849]은 15살 때 아버지 김병덕(金炳德)이 세상을 떠났다. 슬퍼하는 마음이 지나쳐 몸이 상할 정도였다. 장삿날에는 아버지를 묻고 나서 그 곁을 떠나려하지 않았다. 온갖 방법으로 달랬으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그의 작은 아버지가 이렇게 말했다. “홀로 남은 어머니를 버리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불효요 무서운 산골에서 산짐승에게 버리는 것은 어버이의 뜻을 저버리는 가장 큰 불효가 아니냐.” 하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그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데리고 집으로 왔다. 그로부터 몇 해 후 홀로 남은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 金氏)가 병이 들었다. 백방으로 약을 구해 간병을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양친을 모두 잃었다는 슬픔에 몸을 가누지 못하다가 시묘를 하며 날마다 곡을 하였다. 어느 날 밤에 마을 사람들이 깊은 산중에서 외롭게 생활하는 그를 위로하고자 찾아갔다. 그런데 큰 호랑이가 묘막 앞에 가로누워 있어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이튿날 다시 찾아간 마을 사람들은 지난밤의 일을 그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어두운 밤이라서 바위를 잘못 본 것이 아니겠냐며 오히려 사람들의 말문을 막았다. 이로써 사람들은 그의 성품과 행실에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김제균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유림에서는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확인하고는 1940년 4월 포상과 함께 효자각을 세웠다.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제균정효각(濟均旌孝閣)

의성군 다인면 송호리

진사공(홍)파 25세 제균(濟均)의 정효각이다.

김제균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게 되자 효자의 마음이 조정에 알려져 공이 태어난 사호 마을 앞에 지역 유림에서는 그 사실 여부를 조사하여 확인하고는 1940년 4월 효자 포창지(褒彰誌)를 받아 정려되었고 포창과 함께 효자 각을 세웠다.

광복 후 증손 만동(萬東)이 비각을 세웠다. 비각은 단칸(單間)규모의 우진각집인데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2짝 철 대문을 달아 비각으로 출입케 하였다.

비각의 전면에는 홍살을 세워 내부의 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였는데 비각 내에는 孝子鳳窩金濟均之碑(효자 봉와 김제균지비)라 각자한 석비(石碑)가 세워져 있다. 가구는 3량 가의 소로 수 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김제균 효자각(사부)이 2013년 12월 새로 단장한 모습이 보인다. 효행사실을 기록한 봉와공행적은 낙파 유고집에 수록되어 있고 정효각 상량문은 김조현(金祖顯)이 지어 고사하였다. 봉와공실기가 전한다. ,

진사공(홍)파
제균(濟均)
자(字)우여(禹如)
호(號)봉와(鳳窩)
생(生)1796년 병진(丙辰) 陰7월 22일
 효행으로 경진년에 정효각(旌孝閣)이 세워졌다
졸(卒)1849년 기유(己酉) 5월 18일
묘(墓)의성군(義城郡) 다인면(多仁面) 송호리(松湖里) 대흥산(大興山) 부(府)
  오른쪽
임좌(壬坐) 연분(連墳)
묘표(墓表)가 있다
배(配)경주설씨(慶州薛氏)
생(生)1790년 경술(庚戌) 월 일
졸(卒)1830년 경인(庚寅) 12월 15일
묘(墓)의성군(義城郡) 다인면(多仁面) 송호리(松湖里) 대흥산(大興山) 부우(祔
 右)
임좌(壬坐) 연분(連墳)
묘표(墓表)가 있다
 부(父)국용(國龍)
22 세23 세24 세25 세26 세
기순(基淳)휘근(輝根)병필(炳弼)취균(就均)원진(元鎭)
형진(亨鎭)
병덕(炳德)제균(濟均)경진(慶鎭)
영진(泳鎭)
익진(益鎭)
병간(炳侃)취균(就均)
복균(福均)
일근(一根)병수(炳壽)태균(兌均)하진(河鎭)
낙진(洛鎭)
권병인(權秉仁)
이균(离均)회진(淮鎭)
이수천(李受天)
병오(炳五)법균(法均)맹진(孟鎭)
예균(禮均)국진(國鎭)
황한철(黃漢喆)
낙균(洛均)맹진(孟鎭)
흥진(興鎭)
상진(相鎭)
인영호(印永鎬)
여길영(呂吉永)
김교택(金敎澤)
병명(炳命)상균(尙均)
만균(晩均)
오병모(吳秉模)
석근(碩根)병철(炳喆)도균(道均)하진(夏鎭)
은진(殷鎭)
주진(周鎭)
김노포(金魯蒲)
도학선(都學善)
김두용(金斗龍)
이기태(李起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