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병조참판(贈兵曹叅判)  인보(仁輔) |
조선 중기 무신. 자는 택지(宅之)이고 호는 돈수(遯叟)‧낙빈(洛濱)이다. 거주지는 경상북도 안동군 길안면(吉安面)이다. 부친은 부호군(副護軍) 김진(金鎭)이다. 부친을 따라 길안면 묵계리(黙溪里) 봉월산(蜂月山)에 들어가 약초를 캐고 고기를 잡으며 부친으로부터 가학을 이었다. 1607년(선조 40) ‘문무론(文武論)’을 제진하여 무과 급제한 후 1608년(선조 41) 전라병마절도사군관(全羅兵馬節度使軍官)에 제수되었다. 이후 1611년(광해군 3) 훈련원봉사(訓練院奉事)를 1616년(광해군 8)에 선전관(宣傳官) 등을 지냈다. 그러나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안치시키고 인목대비를 동궁에 유폐하자 충장공(忠壯公) 박영신(朴榮臣)‧충민공(忠愍公)윤정준(尹廷俊)과 함께 이에 대해 부당하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남해도로 유배를 당했다. 인조반정 후 거산도찰방(居山島察訪)으로 복직되었고 이괄(李适)의 난에 공을 세웠으며 녹도만호(鹿島萬戶)에 제수되었으며 1636년(인조 14)에는 평안도병마우후(平安道兵馬虞侯)를 지냈다. 만년에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과 표은(瓢隱) 김시온(金是驀) 등과 나라를 걱정하며 향리에 은거하였다. 사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유고로 『돈수일고(遯叟逸稿)』가 전한다. |
낙빈정(洛濱亭)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 ||||||||||||||||||||||||||||||||||||||||||||||||||||||||||||||||||||||||||||||||||||||||||||||||||||||||||
돈목당(敦睦堂)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 ||||||||||||||||||||||||||||||||||||||||||||||||||||||||||||||||||||||||||||||||||||||||||||||||||||||||||
돈수재(遯叟齎)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
장사랑공(환)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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