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의병(靑陽義兵)  덕진(德鎭) |
자는 경명(景明) 호는 낙계(樂溪). 충청남도 청양 출신. 김덕진의 청양군 삼가(靑陽郡三街)에서 낙포선생 중일(洛圃先生 重鎰)의 9세손으로 태어났다.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체결되자 전국의 뜻 있는 지사들이 총궐기하여 의병운동을 일으켰다. 을사 의진 중에 호서(湖西)지방에서 크게 활약한 것은 홍주(洪州)의진이었다. 홍주는 일찍이 을미(乙未) 의병의 중진(重鎭)이었으므로 김복한(金福漢) 안병찬(安秉瓚) 등이 쌓아 올린 대일 투쟁 경력을 갖고 있던 지방이었다. 이들은 처음에 면암을 추대하고자 하였으나 실패하고 다시 민종식(閔宗植)을 추대하여 의거의 기치를 올렸다. 김덕진 역시 이 운동에 군사로서 참여하여 활약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06년 윤 4월 9일(양 5월 31일) 일군의 홍주 진격시 성을 빼앗기고 의병들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일에 대하여 김덕진은 후에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덕진은 용렬한 선비로서 만 가지가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나 다만 의리의 한계에 있어서는 일찍이 스승과 친구들의 강론한 나머지를 얻었으므로 충분심이 격동되어 역량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시세도 살펴보지 아니하고 동지 6 7명과 함께 대략 서로 모의하여 의기 있는 사람 천여 명을 규합해서 홍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하느님이 끝내 죄 준 것을 뉘우치지 아니하여 필경 반목이 생기자 이로 인해 멀리 섬 중으로 귀양간 사람도 적지 않았는데 모두 함께 죽기로 약속한 사람들이다. 나는 요행이 화를 면하여 구차히 목숨을 유지하고 있노라니 그 마음조차 세상에 내보일 수 없어서 쳐다보아도 부끄럽고 굽어보아도 부끄러울 뿐이다.” 이상의 글로 미루어 보아 성세를 이루던 홍주의진이 그토록 쉽사리 무너진 것은 내분 때문이었던 듯하다. 이 때 80여 장병이 순국하고 80여 의사가 체포 압송되어 서울에서 심문 받게 되었다. 체포되지 않은 홍주의진의 주도적인 인물들이 1906년 9월 중순 충남 예산(禮山)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규합을 꾀하였다. 특히 예산읍에서 북쪽으로 10리 거리에 있는 한곡(閑谷 지금의 大述面 上項里)에 살고 있던 이용규(李容珪)의 족형인 전 참판 이남규(李南珪)의 집에서 김덕진을 비롯하여 이용규 곽한일(郭漢一) 박윤식(朴潤植) 김운락(金雲洛) 황영수(黃英秀) 정회규(鄭會圭) 박창로(朴昌魯) 이만식(李晩植) 등 수십 명이 의거준비를 진행시켰다. 이용규는 민종식의 매형일 뿐 아니라 모두 홍주의진 계열의 인물로써 구성되었기 때문에 대장을 민종식으로 삼고자 하였다. 민종식은 홍주의거 실패 후 산곡에 의지하여 은신하고 있던 것을 이남규가 은신처를 제공하여 아산 감밭(道古面)의 동지인 성모(成某)의 집에 숨겨 주었다. 계획이 점차 구체화되어 가자 조직을 구성하여 김덕진은 이용규 곽한일과 함께 참모에 임명되었고 박윤식은 운량관(運糧官) 황영수 정재호(鄭在鎬)는 중군장에 임명되었다. 9월 그믐에 수백 명의 건장한 군사들을 예산읍 근처에 배치하고 음력 10월 5일에 예산읍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일이 예산에서 활약하고 있던 일진회원에게 탐지되어 계획의 일부가 일본 헌병대에 알려지게 되었다. 10월 2일 새벽 일본 헌병 10여 명과 순사와 병정 40여 명 그리고 일진회원 등 수십 명에 의해 이남규의 집이 포위공격을 당하였다. 이로써 김덕진을 위시하여 이용규 이남규 부자 곽한일 민종식 등이 모두 적에게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공주 경무청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경성 평리원(京城 平理院)으로 이감되어 문초를 받았다. 김덕진의 공사(供辭)는 다음과 같다. “아! 종묘 사직의 존망과 임금의 안위(安危)와 문명과 야만의 한계나 사람과 짐승의 구분이 이번 거사에 달려 있으니 만약 성공만 했다면 오늘날 먼저 네 머리를 베고 또 장차 네 놈의 종자를 토벌하며 저 5적 놈들을 처단할 터인데 시운 소관으로 형세가 당적할 길이 없으니 다시는 여지가 없다. 다만 유감 되는 바는 그 뜻을 마침내 펴지 못했으니 죽어도 눈을 못 감고 또 사방의 웃음거리를 면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것이 좋겠다. 나는 언제나 몸을 희생하여 인(仁)을 이루는 것과 목숨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으로 평생의 법을 삼아 온 처지다. 네놈들의 이른바 법률이란 것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이것으로써 보고하여 하루 빨리 처결해 주기 바란다.” 위의 공사는 의병의 모범적인 것으로 첫 손에 꼽히는 것으로서 그의 사상이 위정척사(衛正斥邪)에 기초를 둔 것임을 알게 하며 그의 학문적 배경도 미루어 짐작케 해 준다. 1907년 7월 김덕진은 함께 체포된 이용규(李容珪) 곽한일(郭漢一) 황영수(黃英秀) 박윤식(朴潤植) 박두표(朴斗杓)와 함께 종신형을 언도받고 지도(智島)로 유배되었으며 의병장 민종식(閔宗植)은 진도(珍島)로 유배되었다. 김덕진은 7개월만에 석방되었다. 1919년 유림 측에서 파리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고 독립을 청원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는데 김덕진은 이에 참여하여 서명한 137인 중 1인이었다. 그 후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김덕진은 정원택(鄭元澤)과 함께 국내로 파견되어 평소 신규식과 친분이 있던 서울의 정두화(鄭斗和)를 만나 임시정부의 재정 조달 문제를 협의하는 등 계속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1980.. | 독립운동(獨立運動) 건국 포장 | |
1990.. | 독립운동(獨立運動) 건국훈장 애국장 |
증승지공(규보)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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