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병욱(炳昱)


자는 문거(文擧) 호는 뇌서(磊棲). 문경 출생.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김석근(金襫根)이며 어머니는 문희전씨(聞喜錢氏)로 전도석(錢道碩)의 딸이다.



18세 때 서울에 올라와 김희순(金羲淳)과 김수근(金洙根) 두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병학(金炳學)·김병국(金炳國)과 교유하였다.



1858년(철종 9) 궁중의 경사로 6품 벼슬에 등용되어 1860년에 사헌부감찰과 장악원주부를 거쳐 1862년에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소문난 연풍(延豊)의 현감으로 임명되어 큰 치적을 남기며 숙폐(宿弊)를 일소하였다.새로 부임한 감사와의 알력으로 사직하고 돌아오자 현에서 동비(銅碑)를 세워 덕을 기렸다.



1867년(고종 4) 문경현(聞慶縣)의 숙폐를 다스리다 토호로 몰려 문화(文化)로 귀양갔다. 이때 귀양지에서 「태평오책(太平五策)」을 올렸는데 고종으로부터 크게 칭찬을 들었고 귀양도 곧 풀렸다.1882년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다.



항상 지(知)·인(仁)·용(勇) 중에서 용이 학문의 관건임을 들어 자신이나 후진을 채찍질하였고 삼정(三政)에 대한 해박한 식견은 고금을 통틀어 막히는 데가 없었으며 늘 개혁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저서로는 『뇌서집(磊棲集)』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병욱(金炳昱))]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뇌서집(磊棲集)

조선후기 문신·학자 김병욱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23년에 간행한 시문집.
1907년 김병욱의 아들 성규(星圭)와 장손 호진(灝鎭) 등이 편집·필사하였다. 필사본의 경우 서문은 없고 권말에 김성규의 발문이 있다. 1923년 김우진(金祐鎭)이 연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6권 2책. 필사본 및 연활자본. 국립중앙도서관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 등에 있다.
권1·2에 시 434수 권3에 서(書) 31편 소 5편 서(序) 3편 기 3편 발 2편 권4에 제문 9편 가장(家狀) 1편 논설 18편 전(傳) 1편 표 3편 권5에 잡저 8편 권6에 잡저 5편 공문(公文) 19편 부록으로 가장 1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밖에 이 책을 정초(正草)하기 전 주필(朱筆)의 흔적이 선연하게 남은 초록 시고(詩稿)가 권말에 함께 묶여 있다.
서(書)에는 당시 국권을 잡고 있던 김병국(金炳國)·김병학(金炳學)과 국정에 대해 주고받은 편지와 민태호(閔台鎬)·민규호(閔奎鎬) 및 흥선대원군에게 보낸 편지도 있어 당시 그의 교유관계와 인맥 정치상의 활약 등이 매우 넓었음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그 내용들도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시킬 삼정(三政)에 대한 고언(苦言)들로 점철되어 있다.
그의 삼정에 대한 견해는 「정축재소(丁丑再疏)」·「유곡역취모의(留穀亦取耗議)」·「논적정(論糴政)」·「논군정징색지폐(論軍丁徵索之弊)」·「사창절목(社倉節目)」 등에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는 환자[還上]를 빌미로 국민을 수탈하는 갖가지 명목의 세금들을 열거하고 환자를 정부에서 취급하지 말고 마을별로 관장하면서 모조(耗租)만을 정부가 거두어들일 것을 제시하였다.
또한 군대의 위영제도(衛營制度)의 문란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여러 가지 혁신책들을 제시하면서 정부의 집정자들에게 이러한 여러 역사적인 고찰과 그의 경략은 성인이 다시 난다고 하여도 내 말을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에 찬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가장에는 그의 이런 견해를 집합한 『태평오책(太平五策)』이라는 역저가 있어 고종에게 많은 칭찬을 들었으나 불타고 없어졌다고 하였다.
「복사소견(鵩舍消遣)」은 그가 고향 문경에서 폐단을 일소하려다 토호(土豪)로 몰려 문화(文化)에 귀양가서 당시 삼정의 문란 관리들의 수탈 토호의 폐단 당시 정객들의 인물평을 80여 조목으로 나누어 기록한 것으로 당시 사회상을 이해하는 자료이다.
「문경현구폐전말(聞慶縣捄弊顚末)」은 그가 문경의 유지들과 폐정을 척결한 전말을 적은 것이고 임오군란의 시발을 분석한 「국변기략(國變紀略)」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에서 일본의 침략을 예시한 「인항설(仁港說)」 압록강 연안의 무창(茂昌)·여연(閭延)·우예(虞芮)·자성(慈城)을 군(郡)으로 승격해 변방의 경계를 튼튼히 할 것을 주장한 「복사군의(復四郡議)」가 있다.
「수불론(讎佛論)」도 그의 역저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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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12.10철종 11년장악주부(掌樂主簿)

1862.12.08철종 13년연풍현감(延豊縣監)


안동김씨대종중
승의랑공(기보.극)파
병욱(炳昱)
자(字)문거(文擧)
호(號)뇌서(磊棲)
생(生)1808년 무진(戊辰) 9월 8일
관직(官職)음보(蔭譜)
통정대부(通政大夫)
연풍(延豊)현감(縣監)
돈녕부(敦寧府)도정(都正)
저서(著書)뇌서집(磊棲集)
 성품이 강직하고 절의가 있고 세상을 경영할 재주를 가지고 있었다.그러나
  권력과 부귀를 멀리하여 권귀(權貴)를 싫어하여 인재로 쓰이지 못하였다
 .
졸(卒)1885년 을유(乙酉) 12월 27일
묘(墓)상주군(尙州郡) 함창면(咸昌面) 덕통리(德通里) 十三번지 산 즉 마을뒤
 주산 옥녀봉 상봉 석물을 만들어 세우고 자기지석을 만들어 묻었다
간좌(艮坐)
배(配)증(贈)숙부인(淑夫人)전주이씨(全州李氏)
생(生)1805년 을축(乙丑) 월 일
졸(卒)1831년 신묘(辛卯) 2월 29일
합폄(合窆)
 부(父)치효(致孝)
 조(祖)양옥(陽玉)
 증조(曾祖)재노(齋老)
 외조(外祖)곽창국(郭昌國) 본(本) 청주(淸州)
배(配)증(贈)숙부인(淑夫人)안동권씨(安東權氏)
생(生)1811년 신미(辛未) 월 일
졸(卒)1861년 신유(辛酉) 6월 4일
묘(墓)문경군(聞慶郡) 문경면(聞慶面) 마원리(馬院里) 봉명산(鳳鳴山) 서쪽 기
 슭 6-1 원정곡리((元井谷里) 안산(案山)
오좌(午坐)
 부(父)달종(達宗)
 조(祖)형운(衡運)
 증조(曾祖)성규(聖規)
 외조(外祖)이성원(李星遠) 본(本) 흥양(興陽)
배(配)숙부인(淑夫人)순흥안씨(順興安氏)
생(生)1835년 을미(乙未) 1월 20일
졸(卒)1888년 무자(戊子) 9월 27일
묘(墓)장성군(長城郡) 북삼면(北三面) 용강리(龍岡里) 61 원청암역(元靑巖驛)
  서쪽 서봉산(瑞鳳山) 지석을 묻고 또 자기 지석을 만들어 묻었다
 상석 삼면에 아들 성규(星圭) 손자 우진(祐鎭)이 써서 새겼다.
건좌(乾坐)
상석(床石)이 있다
 부(父)통정대부(通政大夫) 광주(廣州)중군(中軍) 정석(廷奭)
 조(祖)통정대부(通政大夫) 오위장(五衛將) 긍집(兢集)
 증조(曾祖)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경권(敬權)
 외조(外祖)무과(武科) 김덕장(金德章) 본(本) 경주(慶州)
21 세22 세23 세24 세25 세
응락(應洛)계순(繼淳)석근(꿁根)병욱(炳昱)풍균(豐均)
성규(星圭)
황의찬(黃義贊)
병시(炳是)선규(善圭)
현규(賢圭)
인규(仁圭)
황기수(黃基秀)
병면(炳冕)남규(南圭)
상규(尙圭)
민규(玟圭)
병섬(炳暹)명규(明圭)
병호(炳昊)봉규(鳳圭)
이병철(李丙轍)
이강수(李康壽)
병황(炳晃)명규(明圭)
세규(世圭)
삼규(三圭)
이호풍(李鎬灃)
권재묵(權在默)
신석윤(申錫奫)
오석승(吳錫升)
최영필(崔永弼)
신광정(申匡鼎)
김민비(金民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