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노진(魯鎭) |
김노진(金魯鎭)은 부(父) 정규(政圭)와 선성이씨(宣城李氏) 사이에서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에서 1893년 4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字)는 경노(景魯)이며 호(號)는 학남(鶴南)이다. 공은 일찌기 개화문명(開化文明)을 접하여 계급타파(階級打破)등 선진문명(先進文明)을 익히고자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재학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류창우(柳昌祐)와 류벽우(柳璧祐)를 후원하고 세브란스의전 김재명(金在明)과도 논의하다가 안동으로 돌아와 김원진(金元鎭) 류동붕(柳東鵬) 김병우(金炳宇) 강대극(姜大極)과 함께 안동지역 3.1운동 방침에 대해 협의 하였다. 그후 예천 용궁(龍宮)에서 신태식(申泰植)이 주도하는 의용단(義勇團) 활동을 지원하고 김용환(金龍煥) 김규헌(金奎憲)과 함께 임시정부(臨時政府)에 보낼 독립자금(獨立資金) 모집에 주력하였다. 또 본인의 토지와 우마를 매각하여 독립자금에 충당하였고 길림성(吉林省)을 왕래하면서 이상룡(李相龍) 노백린(盧伯麟)과도 연락을 취하였다. 서울에서 이상재(李商在) 안재홍(安在鴻) 현상윤(玄相允) 김상기(金庠基)와 교류하여 후진들에게 민족정기를 보급하였으며 신간회에 가입하여 경향각지를 누비면서 활동하던중 일경이 자주 소환하므로 다시 도만(渡滿)하여 북경에서 김시현(金始顯)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해 서로 격려하였다. 그후 김응섭(金應燮)과 함께 봉천(奉天) 장춘(長春) 지역 일대를 편력하면서 동지규합과 군자금모금에 주력하던중 1940년 봉천에서 일본 헌병에 잡혔으나 격투끝에 탈출하여 간도지역을 배화하다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칩거하던중 해방을 맞게 되었다. 건국사업에 매진하였으나 친일파가 횡횡하므로 소산리에 있는 조카 용한(龍漢)의 집에서 소일하던중 1960년 졸하셨다. 공은 실로 군자금조달로 가산은 탕진되었으나 민중계몽의 선구자셨다. |
승의랑공(기보.극)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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