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승(秘書丞)  녕한(寗漢) |
자는 기오(箕五)이고 호는 급우재(及愚齋) 또는 동강(東江)이다. 출신지는 충청남도 공주군(公州郡) 공암리(孔巖里)이다.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13세손으로 고조부는 공조참판(工曹參判) 증영의정(贈領議政) 김연근(金淵根) 증조부는 순조의 3녀 복온공주(福溫公主)와 혼인하여 창녕위(昌寧尉)에 봉해졌으며 영의정(領議政)에 증직된 김병주(金炳疇) 조부는 돈녕부참봉(敦寧府參奉) 증참정(贈參政) 김도균(金道均)이다. 부친은 판돈녕원사(判敦寧院事) 김석진(金奭鎭)이고 생부는 면천군수(沔川郡守) 김홍진(金鴻鎭)이다. 외조부는 해평윤씨(海平尹氏) 윤치보(尹致輔)이고 처부는 좌부승지(左副承旨) 반남박씨(潘南朴氏) 박가양(朴嘉陽)이다. 빼어난 총명함을 타고 났으며 예닐곱 살 때부터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17세에 1894년(고종 31)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409위로 합격하였다. 1898년(광무 2)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부친의 병으로 나가지 않고 영릉참봉(寧陵參奉)으로 옮겼다. 효종 승하 180년 작헌례 때 당하관 중 육품이상 곧 참상(參上)으로 올라 승륙(陞六)으로 승전되어 영릉령(英陵令)에 제수(除授)되었다. 1900년(광무 4) 시강원시종관(侍講院侍從官)으로 삭녕군수(朔寧郡守)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901년(광무 5)에는 용인군수(龍仁郡守)에 이듬해에는 양근군수(陽根郡守)에 제수(除授)되었으며 1903년(광무 7) 어진(御眞)을 모셔 서경(西京)에 봉안하였다. 그해 9월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제수(除授)되고 헌종 계비 효정왕후 남양홍씨(南陽洪氏)의 혼전(魂殿:왕족의 국상(國喪) 이후 종묘에 위패를 봉안하기 전까지 3년간 신주와 혼백(魂帛)을 모시는 방)인 효혜전(孝惠殿)의 향관(享官)에 차정되었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 이후 세상에 대한 뜻을 접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묘는 서울 강북구 번동의 효정공(孝貞公) 김병주와 복온공주(福溫公主) 묘 남쪽에 있으며 부인과 합장되었다. 아버지 김석진의 묘도 이곳에 함께 있다. 문집으로 『급우재집(及愚齋集)』이 있다. |
급우재집(及愚齋集)대한제국기 관료 김녕한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61년에 간행한 시문집. |
1894.. | 고종 31년 | 진사(進士) 고종(高宗) 31년(1894) 갑오(甲午)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410위(439/1055) |
1902.01.28 | 고종 39년 | 용인군수(龍仁郡守) |
1902.09.04 | 고종 39년 | 양근군수(楊根郡守) |
1903.05.12 | 고종 40년 | 삭령군수(朔寧郡守) |
1903.09.05 | 고종 40년 | 비서원승(秘書院丞) |
문정공(상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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