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대신(學部大臣)  명규(明圭)


서울 출신.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가 내정에 개입하여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을 납치해 간 뒤 그를 귀국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민씨정권은 당시 승정원동부승지로 있던 김명규를 문의관(問議官)으로 톈진[天津]에 파견 그 반대운동을 벌였다.

1885년(고종 22)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이 되었고 1886년 여주목사(驪州牧使) 1889년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1톈진 주재 독리통상사무(督理通商事務)의 직함을 가지고 주로 대외적인 일에 종사하다가 이조참판(吏曹叅判)이 되었다.

1890년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1892년 협판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1896년에 궁내부특진관(宮內府特進官)

1898년 농상공부대신(農商工部大臣) 학부 대신(學部大臣)등을 역임하였다.

1898년 당시 의정부참정 박정양(朴定陽)이 관민공동회 발기인 윤치호(尹致昊)에게 정부측 요인들이 관민공동회에 참석할 뜻을 비추자 이에 동의하여 긍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그러나 수구파들이 관민공동회에 관계한 인사들을 모략하기 위해 이른바 익명서사건을 조작하여 고종이 독립협회의 해산령을 내리고 관민공동회에 참가하여 찬성한 대신들을 해임시킬 때 함께 면직되었다.

뒤에 다시 복직되어 임시서리의정사무(臨時署理議政事務)·학부대신 등을 지냈다.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문정공(상헌)파
명규(明圭)
구보(舊譜)정규(禎圭)
자(字)명수(命叟)
시호(諡號)문정(文靖) 勤學好問(근학호문) 寬樂令終(관락영종)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남에게 묻기를 좋아함이 문이요 너그럽고 즐거워하며 아름답게 인생을
사는 것이 정이다.1907
생(生)1838년 무술(戊戌) 8월 6일
관직(官職)을유(乙酉)문과(文科)
정헌대부(正憲大夫)
농상부(農商部)대신(大臣)
졸(卒)1899년 기해(己亥) 12월 28일
배(配)정부인(貞夫人)은진송씨(恩津宋氏)
생(生)1825년 을유(乙酉) 9월 10일
졸(卒)1844년 갑진(甲辰) 6월 22일
 부(父)헌필(憲弼)
 조(祖)응인(膺仁)
 외조(外祖)김치현(金穉鉉) 본(本) 광산(光山)
22 세23 세24 세25 세26 세
성순(聖淳)보근(葆根)병용(炳龍)명규(明圭)화진(華鎭)
종규(宗圭)
조원호(趙源鎬)
용근(用根)병흠(炳欽)대규(大圭)재진(在鎭)
영규(英圭)중진(仲鎭)
화근(華根)병례(炳禮)필규(弼圭)광진(光鎭)
복규(福圭)대진(大鎭)
광진(光鎭)
대규(大圭)유진(裕鎭)
병욱(炳旭)응규(應圭)효진(孝鎭)
종근(宗根)병택(炳澤)원규(元圭)후진(厚鎭)
형진(衡鎭)
도진(道鎭)
경진(慶鎭)
채(蔡)
인규(仁圭)
병호(炳浩)인규(仁圭)형진(衡鎭)
이원목(李源穆)
이규(李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