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영한(永漢)


김영한(金永漢)은 김여진(金麗鎭)과 인동장씨(仁同張氏) 사이에서 2남 2녀중 장남으로 1895년 에 태어났으며 호적명은 김영환(金永煥)이며 자(字)는 응창(應昌)이다.



경상남도 창원(昌原) 사람이다. 1919년 4월 3일의 진전면(鎭田面)·진북면(鎭北面)·진동면(鎭東面)의 연합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3월 28일의 진동면 고현리(古縣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한 후 피신했던 변상태(卞相泰)·권영대(權寧大)·권태용(權泰容)등에 의해 계획되었는데 그들은 이곳의 청년유지 변상섭(卞相攝)·황태익(黃泰益)·김수동(金守東)·김영종(金永鍾)·구수서(具守書)·변상술(卞相述)·변우범(卞又範) 등과 연락을 취하며 4월 3일 인근의 3개면민들을 동원하여 진전면 양촌리(良村里)의 냇가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4월 1일 변상태·황태익 등은 변우범의 집에 모여 회의를 한 후 동리 서당에서 태극기를 제작하여 미리 동리 사람들에게 배부해 주고 인근지역을 순회하며 민중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4월 3일 오전 9시 수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양촌리 냇가에 집결하였다. 변상섭의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변상태가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양촌리 계곡은 온통 태극기의 물결속에 독립만세 소리로 진동하였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으로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이때 별도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른 후 진전면의 시위대열을 기다리던 진동면민들도 이에 가세하여 시위군중은 5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2시 시위대열이 진북면 사동리(社洞里) 다리앞에 이르렀을 때 급보를 받고 출동한 일본 헌병과 보조원 8명 및 재향군인 30여명이 시위군중과 충돌하였다. 일제와 피비린내 나는 육박전이 벌어져 다수의 부상자가 속출하고 있을 때 마산(馬山)에서 응원 출동한 일본군 야포대대 군인이 현지의 일본 헌병 보조원 재향군인과 합세하여 무차별 사격을 가하였다.



이 야만적인 발포로 8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22명이 부상당하였는데 이때 그도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1968..독립운동(獨立運動)대통령표창

1991..독립운동(獨立運動)건국훈장 애국장


안동김씨대종중
휴암공(상준)파
영한(永漢)
자(字)응창(應昌)
생(生)1895년 을미(乙未) 7월 8일
상훈(賞勳)건국훈장애국장
 기미독립운동시 일본에 항거하다가 순사(殉死)하였다.
졸(卒)1919년 기미(己未) 3월 3일
묘(墓)대송전(大松田)
축좌(丑坐)
배(配)김해김씨(金海金氏)
생(生)1901년 신축(辛丑) 4월 6일
졸(卒)1938년 무인(戊寅) 9월 5일
묘(墓)같은 둔덕
 부(父)인배(仁培)
24 세25 세26 세27 세28 세
병복(炳復)처균(處均)국진(國鎭)종한(琮漢)익동(翼東)
수동(守東)
차동(次東)
안승호(安承鎬)
호한(浩漢)경동(慶東)
계동(桂東)
김장식(金長植)
박판식(朴判植)
김순계(金順桂)
윤무현(尹戊昡)
여진(麗鎭)영한(永漢)계동(桂東)
수한(壽漢)문동(文東)
변상익(卞相益)
김일경(金一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