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년(철종 8) 6월 14일∼1927년 8월 19일. 일제 강점기 관료. 본적은 경성부(京城府: 현 서울) 중학동(中學洞)이다.
조선 말기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와 탁지부주사(度支部主事)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대한제국기에 법부참서관(法部參書官)‧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탁지부 인쇄국장 등을 지냈다. 1910년(융희 4) 조선총독부 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가 된 후 같은 해 10월 23일부터 11월 16일까지 조선귀족관광단의 일원으로서 일본에 다녀왔다.
1912년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1918년 종4위에 서위되었다. 또 1920년 서울과 경상도의 유림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유도진흥회(儒道振興會) 초대회장을 지냈으며 1921년에는 이사직을 맡았다. 1920년 중추원찬의로 재임하던 중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서보장(瑞寶章)을 받았으며 1921년부터 1927년까지 조선총독부의 중추원참의를 지냈다.
1924년 4월 내선융화(內鮮融和) 실행을 목적으로 내세운 동민회(同民會)가 결성되자 창립 초기부터 사망할 때까지 동민회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중추원참의 재직 시의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3등 서보장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