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참판(戶曹叅判)  옥균(玉均) |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또는 고우(古愚). 충청도공주 출신. 김병태(金炳台)의 장남으로 7세 때 당숙 김병기(金炳基)에게 입양되어 서울에서 성장하였다. 11세 때인 1861년 양부 김병기가 강릉부사에 임명되어 임지에 가자 양부를 따라 강릉에 가서 16세까지 율곡사당(栗谷祠堂)이 있는 서당에서 율곡 학풍의 영향을 받으면서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학문뿐 아니라 문장·시·글씨·그림·음악 등 예능부문에서 탁월한 소질을 발휘하였다.당시 오경석(吳慶錫)·유홍기(劉鴻基)·박규수(朴珪壽) 등에 의해 근대적 개혁을 위한 개화사상이 형성되고 있었다. 김옥균은 다른 청년들과 함께 1870년 전후부터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개화사상을 배우고 발전시켜 개화사상을 가지게 되었다.1872년 알성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874년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부터 정치적 결사로서의 개화당의 형성에 진력하여 다수의 동지들을 모아 지도자가 되었다. 1879년 개화승 이동인(李東仁)을 일본에 파견해 일본의 근대화 실태를 알아보게 하였다. 그리고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의 파견을 주선하도록 하였다. 국내에서 혁신의 뜻을 가지고 있는 관리들과 청년들을 모아 개화당의 세력확장에 진력하였다.김옥균은 스스로 일본의 근대화 실정을 시찰하기 위해 1881년 음력 12월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의 진전 과정을 돌아보고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가들과도 접촉하여 그들의 정치적 동향 등을 상세히 파악하였다. 돌아오는 도중에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에 이르렀을 때 본국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귀국하였다. 제1차 도일(渡日) 직후에 『기화근사(箕和近事)』를 편찬하였다.임오군란이 수습된 뒤 승정원우부승지·참의교섭통상사무(參議交涉通商事務)·이조참의·호조참판·외아문협판(外衙門協辦) 등의 요직을 거치면서 자주근대화와 개화당의 세력 확대에 진력하였다. 김옥균은 일본이 동양의 영국과 같이 되어가는 것을 보고 조선은 동양의 프랑스와 같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만들어야 나라의 완전 독립을 성취하여 유지할 수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 전반에 대경장개혁(大更張改革)을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양반신분제도의 폐지 문벌의 폐지 신분에 구애받지 않는 인재의 등용 국가재정의 개혁 공장제도에 의거한 근대 공업의 건설 광업의 개발 선진 과학기술의 도입과 채용 상업의 발달과 회사제도의 장려 화폐의 개혁 관세 자주권의 정립 농업과 양잠의 발전 목축의 발전 임업의 개발 어업의 개발과 포경업의 개발 철도의 부설과 기선 해운의 도입 전신에 의거한 통신의 발전 인구 조사의 실시 등을 주장하였다. 또한 학교를 널리 설립하고 신교육의 실시를 주장했다. 자주 국방력 양성 경찰제도의 개혁 형사행정의 개혁 도로의 개선과 정비 위생의 개혁 종교와 신앙의 자유 허용 조선의 중립화 등도 주장하였다.김옥균은 이러한 주장을 국가 정책으로 실천하고자 했으나 청국의 극심한 방해를 받았다. 당시 청국은 임오군란의 진압을 위해 3 000명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해 대원군을 납치해 갔다. 임오군란을 진압하여 민씨정권을 재수립한 뒤에도 철수하지 않고 청군을 그대로 서울에 주둔시킨 채 조선을 실질적으로 속방화(屬邦化)하기 위한 적극적인 간섭정책을 자행하였다.청국은 김옥균 등의 자주근대화정책이 그들의 속방화정책에 저항하는 것이며 청국으로부터의 조선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고 김옥균 등의 개화당과 개화정책을 극도로 탄압하였다. 청국의 도움으로 재집권한 민씨친청 사대수구파들도 이에 야합하여 김옥균 등 개화당을 박해하였다.임오군란 후 1882년 9월 김옥균은 수신사 박영효(朴泳孝)의 고문이 되어 제2차로 일본에 건너갔다. 수신사 일행을 먼저 귀국시키고 서광범(徐光範)과 함께 더 체류하면서 본국으로부터 유학생들을 선발해 보내도록 하여 일본의 여러 학교에 입학시킨 다음 1883년 3월 귀국하였다. 당시 일본 동경에 체류하는 동안 『치도약론(治道略論)』을 저술하였다.1883년 6월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제3차로 일본에 건너가서 국채(國債)를 모집하려 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Mӧllendorff P.G.)와 민씨 수구파의 사주를 받은 주조선 일본공사 다케조에[竹添進一郎]가 김옥균이 휴대한 고종의 국채위임장을 위조한 것이라고 본국에 허위 보고하었다. 이로써 국채 모집은 완전히 실패하고 1884년 4월 귀국하였다. 김옥균은 세 차례에 걸친 도일 과정에서 닥쳐올 나라의 위기를 급박하게 느껴 더욱 초조해졌다. 김옥균이 개화정책을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청국 및 왕비 민씨 수구파와의 정치적 갈등과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이에 김옥균은 정변(政變)의 방법으로 먼저 정권을 장악하여 나라를 구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대개혁을 단행할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청국과 프랑스가 안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의 조짐을 보이자 1884년 5월 청국은 조선에 주둔시킨 3 000명의 청군병력 중에서 1 500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켜 서울에 청군은 1 500명만 남게 되었다. 1884년 8월 마침내 청·불전쟁이 일어나 청국은 연전연패하였다. 이에 김옥균은 정변을 일으킬 기회가 왔다고 판단 1884년 9월 개화당 동지들과 함께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일본공사 다케조에가 일본에 갔다가 그 해 10월 30일 서울에 귀임하여 종래의 개화당에 대한 적대정책을 바꾸어 개화당에 접근하였다. 김옥균은 정변에 대한 청군의 무력 개입을 막는 데 이용하기 위해 조선군 1 000명 이외에 일본공사관 호위용의 일본군 150명을 정변에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웠다. 1884년 양력 12월 4일(음력 10월 17일) 우정국 준공 축하연을 계기로 마침내 갑신정변을 단행하였다. 그날 밤으로 민씨 수구파의 거물 대신들을 처단하고 12월 5일 이재원(李載元)주 01)을 영의정으로 홍영식(洪英植)을 좌의정으로 한 개화당의 신정부를 수립하였다. 김옥균은 신정부에서 판서가 임명되지 않은 호조참판을 맡아 재정권을 장악하고 실질적으로 정변과 신정부를 모두 지휘하였다. 개화당은 정권을 장악하자 12월 5일 저녁부터 6일 새벽까지 밤을 새워가며 회의를 열어서 김옥균의 주도 하에 혁신정강(革新政綱)을 제정하였다. 6일 오전 9시 경에 국왕의 전교형식(傳敎形式)을 빌려 공포하였다. 이 날 오후 3시에는 국왕도 추인하여 대개혁정치를 천명하는 조서(詔書)를 내려 국정 전반의 대개혁이 이루어질 듯 하였다. 그러나 청군 1 500명은 이 날 오후 3시부터 갑신정변을 붕괴시키기 위한 무력 개입을 시작해 불법으로 궁궐에 침입 공격해 들어왔다. 외위(外衛)를 담당했던 조선군이 청국 침략군에 저항하다가 패퇴하였다. 그러자 중위(中衛)를 맡았던 일본군도 개화당이 사태를 수습할 사이도 없이 도망하고 철수해 버렸다. 이처럼 청군의 무력 공격을 방어하지 못해 갑신정변은 실패했고 김옥균 등 개화당의 집권은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나고 말았다. 김옥균은 후일의 재기를 기약하고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9명의 동지들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망명한 김옥균을 박해하였다. 1886년 8월 오가사와라섬[小笠原島]에 귀양을 보냈으며 또한 1888년 북해도(北海道)로 추방하여 연금시켰다.그 뒤 동경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어 1894년 3월 청국의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민비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洪鍾宇)에게 상해동화양행(東和洋行) 객실에서 암살당하였다. 청국과 민씨 수구파 정부는 야합하여 시체를 서울양화진(楊花津)에 실어다가 능지처참하였다.4개월 뒤에 갑오개혁으로 개화파정부가 수립되자 이듬해 법부대신 서광범과 총리대신 김홍집(金弘集)의 상소에 의해 죄가 사면 복권되었다. 1910년 규장각대제학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저서로는 『기화근사(箕和近事)』·『치도약론(治道略論)』·『갑신일록(甲申日錄)』 등이 있다. |
김옥균전집(金玉均全集)개항기 문신·정치인 김옥균의 「치도약론」·「치도약칙」·「갑신일록」 등을 수록한 문집. |
1872.. | 고종 9년 | 문과(文科) 고종(高宗) 9년(1872) 임신(壬申) 알성시(謁聖試) 갑과(甲科) 1[壯元]위(01/05) |
1872.02.04 | 고종 9년 | 전적(典籍) |
1872.07.21 | 고종 9년 | 감찰(監察) |
1872.08.02 | 고종 9년 | 지평(持平) |
1874.02.17 | 고종 11년 | 정언(正言) |
1874.02.24 | 고종 11년 | 교리(校理) |
1874.05.16 | 고종 11년 | 수찬(修撰) |
1882.09.14 | 고종 19년 | 응교(應敎) |
1882.09.22 | 고종 19년 | 우부승지(右副承旨) |
1883.02.17 | 고종 20년 | 예조참의(禮曹叅議) |
1883.04.05 | 고종 20년 | 이조참의(吏曹參議) |
1883.10.07 | 고종 20년 | 호조참판(戶曹叅判) |
1884.05.06 | 고종 21년 | 우승지(右承旨) |
1884.10.17 | 고종 21년 | 갑신정변 이날 밤 우정국(郵政局)에서 낙성식(落成式) 연회를 가졌는데 총판(總辦) 홍영식(洪英植)이 주관하였다. 연회가 끝나갈 무렵에 담장 밖에서 불길이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이때 민영익(閔泳翊)도 우영사(右營使)로서 연회에 참가하였다가 불을 끄려고 먼저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는데, 밖에 어떤 여러 명의 흉도(凶徒)들이 칼을 휘두르자 나아가 맞받아치다가 민영익이 칼을 맞고 대청 위에 돌아와서 쓰러졌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흩어지자 김옥균(金玉均)·홍영식·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등이 자리에서 일어나 궐내(闕內)로 들어가 곧바로 침전(寢殿)에 이르러 변고에 대하여 급히 아뢰고 속히 이어(移御)하시어 변고를 피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경우궁(景祐宮)으로 거처를 옮기자 각전(各殿)과 각궁(各宮)도 황급히 도보로 따라갔다. 김옥균 등은 상의 명으로 일본 공사(日本公使)에게 와서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자 밤이 깊어서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서 호위하였다. |
1884.10.20 | 고종 21년 | 갑신정변 당시 도성(都城) 안의 군민(軍民)들은 일본인들을 질시하여 만날 때마다 때려서 죽이거나 상처입히는 일이 많았다. 일본 공사(日本公使)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는 병사를 거느리고 거류민을 보호하여 도성(都城) 밖으로 나갔고, 김옥균(金玉均)·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서재필(徐載弼) 및 생도(生徒) 10여 인은 모두 일본 공사관(公使館)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고 몰래 인천항(仁川港)으로 가서 곧바로 일본으로 도망쳤다. |
1884.11.01 | 고종 21년 | 갑신정변 이조(吏曹)에서 ‘대신(大臣)이 아뢴 일로 인하여 역적들의 연좌되어야 할 친족 가운데 관작(官爵)을 가지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해조(該曹)에서 모두 삭탈관직(削奪官職)을 하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김옥균(金玉均)의 아비 부호군(副護軍) 김병기(金炳基)와 본래의 생부(生父) 김병태(金炳台), 박영효(朴泳孝)의 아비 대호군(大護軍) 박원양(朴元陽)과 형 사사(司事) 박영호(朴泳好), 홍영식(洪英植)의 아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홍순목(洪淳穆)과 형 호군(護軍) 홍만식(洪萬植), 서광범(徐光範)의 아비 호군 서상익(徐相翊), 윤영관(尹泳寬)의 아비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 윤석오(尹錫五), 박응학(朴應學)의 아비 전 목사(前牧使) 박정화(朴鼎和)에 대해서는 모두 삭탈관직을 하였습니다.’라고 아뢰었다. |
1894.03.09 | 고종 31년 | 갑신정변 방금 경기 감사(京畿監司) 김규홍(金奎弘)의 장계(狀啓)를 등보(謄報)한 것을 보니, ‘중국(中國) 병선(兵船)이 월미도(月尾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역적 김옥균(金玉均)의 시체를 싣고 왔으므로 즉시 한양(漢陽) 배에 옮겨 싣고 이어서 경강(京江)으로 출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시체를 검사하는 것은 원래 일의 체모가 그러한 만큼 경조(京兆)와 형조(刑曹)에서 형전에 따라 당일로 거행하게 하고 검험(檢驗)한 사정을 부(府)에 보고하도록 품처(稟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김옥균(金玉均)은 갑신년(1884) 사건이 실패하자 곧 일본에 망명하였는데, 이때에 청국(淸國) 상해항(上海港)에 옮겨가서 미국 조계구역(美國租界區域)에 잠시 있던 중 본국 사람 홍종우(洪鍾宇)에게 암살되었다. 청국 관리가 위력으로 그의 시체를 병선(兵船)에 실어 인천항(仁川港)에 보낸 것이다.】 |
1910.05.23 | 순종 4년 | 복권 \"고 호조 참판(戶曹參判) 김옥균(金玉均)은 일찍이 나라를 다스릴 포부를 안고 벼슬이 높이 올라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해외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세계의 대세에 대해 통찰(洞察)하였으며 여러번 사리에 맞는 훌륭한 말을 아뢰어 나라에서 근심을 스스로 맡았다. 갑신년(1884)에 개혁할 것을 결의하고 세상에 더없는 큰 공적을 세우자고 하였는데 그만 일이 실패하여 갑자기 이웃 나라로 떠돌아다니면서 온갖 고생을 다 겪다가 마침내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정성스러운 일념은 한 번도 나라를 잊은 적이 없었으니 참으로 유신의 선창자이고 문명의 선각자였다. 지난 갑오년에 비록 이미 명백히 해명해주었으나 아직 표창하는 은전을 베풀지 못하였으니 특별히 대광보국숭록 대부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하라. 시호를 주는 절차는 시장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시호를 의정하고, 연시하는 날에는 시종을 보내어 치제하도록 하라.\" |
1910.05.23 | 순종 4년 | 증(贈)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
1910.05.23 | 순종 4년 | 증(贈)규장각대제학(奎章閣大提學) |
1910.06.30 | 순종 4년 | 시호(諡號) 충달(忠達) 廬國忘家(여국망가) 疏中通理(소중통리)나라일을 걱정하여 집안일을 잊음이 충이요 상소문이 이치에 통달함이 달이다 |
문충공(상용)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