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義兵將)  대규(大圭) |
![]() 이들은 동지 규합을 호소하는 격문(檄文)을 지어 살포하여 의병 5백 명을 모병하였다. 곧 그들에게 적절한 무술훈련을 실시하여 실전에 대비하였다. 1906년 2월 영양(英陽) 입암교동(立岩橋洞)의 자택에서 의진의 부서를 확정하고 김대규는 도포장(都砲將)에 피선되었다. 그 후 진보(眞寶) 오누지(池) 작전에 참전하였다. 이 때 일본 헌병 무등(武藤)을 비롯한 적 수 십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그 중 무등은 그 일대 의병탄압의 책임자로서 의병운동 전개에 막대한 피해를 끼친 자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므로 그 의의는 매우 컸다. 1906년 5월 울진 죽변 왜관 전투(蔚珍竹邊倭舘戰鬪)에서 적과 접전하여 크게 물리쳤다. 8월에는 잔류병력을 정비보강하고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의병장이 된 김대규는 휘하의 병사들을 훈련시켜 전력을 보강하여 전투에 대비하였다. 10월에 이르러 병왕동(屛王洞)에서 출동한 왜적을 맞아 격전을 전개하였으나 역부족하여 적에게 사면이 포위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야음을 틈타 물 속으로 뛰어들어 수영으로 간신히 탈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다. 그 후 안동(安東) 임동면(臨東面) 대곡(大谷) 태백산맥 일월산맥 등의 산악지대에 의지하여 적과 대치하여 교전을 하였다. 의진의 치열한 방어전에 견디지 못한 왜적들은 인근의 산악지대에 불을 놓는 방화작전(放火作戰)으로 대처하였다. 결국 김대규는 불길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1907년 11월 21일에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1977.. | 독립운동(獨立運動) 건국훈장 독립장 |
눌재공(생명)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