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덕규(德圭) |
김덕규(金德圭)는 부(父) 김병하(金炳夏)와 모(母) 경주이씨(慶州李氏) 사이에서 1874년 4형제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덕화(德和)이다. 경북 영덕(盈德) 사람이다. 1919년 3월 18일 경북 영덕군 영해면(寧海面) 성내동(城內洞)에서 정규하(丁奎河)·신상문(申相文)·강삼인(姜三仁) 등과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영해 장날의 만세운동은 영덕군내 영해면·병곡면·축산면·창수면 내의 기독교인이 연합하여 일으킨 것이었다. 영해의 만세운동이 구체화된 것은 기독교회 조사 김세영(金世榮)이 서울에서 3·1운동의 광경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와 이 사실을 영덕군내 기독교계의 주요 인사들에게 알리면서였다. 이 때 병곡면의 교회 장로 정규하(丁奎河)는 거사 장소로써 영덕보다는 영해가 좋다고 하여 3월 18일 영해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일으키기로 정하였다. 그리하여 거사 당일인 3월 18일 정오 무렵 정규하의 선창으로 준비해 온 태극기를 흔들면서 독립만세를 고창하였다. 이 때 김덕규는 3천여 명의 시위군중을 이끌면서 주재소를 에워싸고 일경으로 하여금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그런데 일인 경찰부장이 시위대의 태극기를 빼앗으려 하자 김덕규 등은 일인 경찰부장을 비롯한 일경 3명을 응징하는 한편 주재소의 기구들을 파괴한 뒤 면사무소와 우편소 등 일제기관을 점령하면서 민족독립의 의지를 드높였다. 김덕규 등은 이를 저지하려는 영덕경찰서의 일본인 서장을 비롯하여 일경 5명을 여관에 감금시킨 채 만세시위를 강행하였고 이러한 상황은 다음날인 3월 19일에도 이어졌다. 3월 19일 아침에 시위규모는 더욱 늘어나 영해읍을 진동시켰다. 이에 포항에서 일본 헌병이 출동하였으나 시위대의 위세에 눌려 손을 쓰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대구의 일본군 보병 80연대의 병력이 출동하여 총격을 가함으로써 시위군중은 현장에서 8명의 순국자를 내고 해산하였다. 그는 이 일로 피체되어 1919년 7월 11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소요(騷擾)·공무집행 방해·상해(傷害)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공소하였으나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눌재공(생명)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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