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2년(고종 9) 6월 9일∼1941년 8월 13일. 일제 강점기 관료. 창씨한 이름은 평야한목(平野漢睦)이다. 본적은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현 안동시) 안동읍(安東邑)이다.
1895년(고종 32)부터 1897년(광무 1)까지 대구우체사 주사로 활동하였고 1899년(광무 3) 일본으로 건너가서 양잠을 배우고 귀국 1900년(광무 4)에는 농상공부 기수가 되었다. 1904년(광무 8)에는 농상공부 광산국장‧내부 참서관을 거쳐서 1905년(광무 9)부터 1906년(광무 10) 1월까지 시흥군수 1906년(광무 10) 11월에는 경기관찰도 참서관 1908년(융희 2)에는 도사무관 등을 역임하였다.
1910년(융희 4)부터 1912년까지 조선총독부 취조국 위원으로 활동한 후 1924년까지 구관조사에 관한 사무 촉탁‧조선어사전 심사위원‧구관심사위원회 위원‧고적조사위원회 위원‧구관급제도조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14년에 고적조사에 관한 사무를 위한 중추원촉탁으로 근무하다가 1920년 2월 중추원부찬의로 임명되었다가 1921년에는 중추원참의로 임명되었다. 1927년부터 1932년까지 충청북도 참여관으로 재직 중이던 1928년 일본 정부로부터 소화대례기념장을 받았고 1930년에는 훈6등 서보장을 받고 고등관 3등과 종5위에 올랐다. 1939년 6월 다시 중추원참의로 임명되었으나 1941년 8월 재직 중에 사망하였다.
이 외에 1921년 4월 경성일보사 주최 ‘내지관광단’의 단장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1924년에는 동민회 평의원 1925년에는 조선불교단 평의원 1929년에는 조선박람회 평의원 1931년에는 충청북도 명륜회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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