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령현감(開寧縣監)  후근(厚根) |
1862년(철종 13) 개령현감(開寧縣監)으로 재직 중 삼정문란과 서리들의 발호로 민생이 도탄에 빠진 지 이미 오래 되어 진주민란이 일어난 지 40여 일 지난 뒤 익산에 이어 개령에도 민란이 일어났다. 읍민 김규진(金奎鎭)이 격문을 돌리고 민심을 흉흉하게 하자 김후근을 체포@ 구금하였다. 이에 안인택(安仁宅)·이복대(李卜大) 등이 주동이 되어 읍민 수천 명이 난을 일으키자 이방 문기표(文基杓) 등은 표리부동하게 난에 화응하였고@ 정지평(鄭之平) 등은 동헌에 불을 질러 문서를 불태우고 그곳의 부호 박경주(朴慶柱)@ 전 이방(吏房) 우학능(禹學能)@ 전 수교(首校) 우해룡(禹海龍) 등 5명을 박살시키는 한편@ 읍내외의 집 50여 채에 방화하였다. 난이 진압된 뒤@ 현감된 책임으로 영광군 임자도(荏子島)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
1858.01.02 | 철종 9년 | 감역(監役) |
1859.06.03 | 철종 10년 | 개령현감(開寧縣監) |
1862.06.13 | 철종 13년 | 민란으로 김후근을 영광군(靈光郡) 임자도(荏子島)에 정배(定配)하였다. |
1865.01.01 | 고종 2년 | 유배에서 석방되다 |
문정공(상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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