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領議政)  병학(炳學) |
자는 경교(景敎) 호는 영초(潁樵). 김이직(金履直)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인순(金麟淳)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김수근(金洙根)이며 어머니는 조진택(趙鎭宅)의 딸이다. 철종의 장인인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조카이다. 김준근(金浚根)에게 입양되었다. 1853년(철종 4) 현감으로 정시 문과의 병과로 급제 장령(掌令)·사간이 되었다. 1855년 성균관 대사성이 되고 이조참판 을 거쳐 예조판서가 되었다. 수원부유수로 잠시 나가있다 대사헌과 대제학을 제수 받았다. 한성부판윤으로 재직하다 형조 공조 병조 이조판서를 두루 거쳤다. 좌찬성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이 해 실록총재관으로 『철종실록(哲宗實錄)』을 편찬하고 조두순(趙斗淳)·이유원(李裕元) 등과 함께 찬집소총재관으로 『대전회통(大典會通)』을 완성하였다. 보수적인 척화론자로서 1866년 병인박해 때 천주교의 탄압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또한 병인양요로 민심이 흉흉해지자 흥선대원군을 권고해 당시 척화론을 주장하던 이항로(李恒老)를 승정원동부승지로 등용하도록 천거하였다. 영의정을 거쳐 1875년 영돈녕부사가 된 뒤 조일수호조약(朝日修好條約)의 체결에 극렬하게 반대하였다. 1879년 사망하기 직전에도 판부사 홍순목(洪淳穆)·한계원(韓啓源) 영의정 이최응(李最應) 좌의정 김병국(金炳國) 등과 함께 연차(聯箚: 연맹으로 왕에게 쓴 건의문)를 올려 일본이 요구하는 인천·원산의 개항 가운데 인천만은 서울의 백 리 안에 있으므로 결코 허락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
김병학묘(金炳學墓)충남 아산시 권곡동 403-1 |
1849.. | 헌종 15년 | 진사(進士) 헌종(憲宗) 15년(184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55위(85/100) |
1849.12.26 | 철종 즉위년 | 동몽교관(童蒙敎官) |
1852.06.27 | 철종 3년 | 평시주부(平市主簿) |
1852.08.23 | 철종 3년 | 금성현령(金城縣令) |
1853.. | 철종 4년 | 문과(文科) 철종(哲宗) 4년(1853) 계축(癸丑) 정시(庭試) 병과(丙科) 9위(12/15) |
1853.03.19 | 철종 4년 | 직부전시(直赴殿試) |
1853.03.21 | 철종 4년 | 정언(正言) |
1853.04.16 | 철종 4년 | 부교리(副校理) |
1853.04.24 | 철종 4년 | 헌납(獻納) |
1853.04.29 | 철종 4년 | 사복시정(司僕寺正) |
1853.05.16 | 철종 4년 | 병조정랑(兵曹正郞) |
1853.06.05 | 철종 4년 | 수찬(修撰) |
1853.06.26 | 철종 4년 | 응교(應敎) |
1853.07.08 | 철종 4년 | 의주부윤(義州府尹) |
1853.07.11 | 철종 4년 | 동부승지(同副承旨) |
1853.08.16 | 철종 4년 | 공조참의(工曹叅議) |
1854.04.14 | 철종 5년 | 돈녕도정(敦寧都正) |
1854.06.25 | 철종 5년 | 대사성(大司成) |
1857.01.15 | 철종 8년 | 이조참판(吏曹參判) |
1857.02.26 | 철종 8년 | 동의금부사(同義錦府事) |
1857.03.05 | 철종 8년 | 형조참판(刑曹參判) |
1857.05.06 | 철종 8년 | 동돈녕부사(同敦寧府事) |
1857.05.25 | 철종 8년 | 공조참판(工曹叅判) |
1857.06.26 | 철종 8년 | 홍문제학(弘文提學) |
1857.06.27 | 철종 8년 | 이조참판(吏曹參判) |
1857.07.13 | 철종 8년 | 도승지(都承旨) |
1857.10.15 | 철종 8년 | 대사헌(大司憲) |
1857.11.01 | 철종 8년 | 호조참판(戶曹參判) |
1858.01.20 | 철종 9년 | 예조판서(禮曹判書) |
1858.01.29 | 철종 9년 | 수원유수(水原留守) |
1858.03.04 | 철종 9년 |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
1858.03.04 | 철종 9년 |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
1858.03.23 | 철종 9년 |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
1858.04.08 | 철종 9년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
1858.04.15 | 철종 9년 | 한성판윤(漢城判尹) |
1858.05.01 | 철종 9년 | 우참찬(右參贊) |
1858.06.27 | 철종 9년 | 이조판서(吏曹判書) |
1858.08.05 | 철종 9년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
1858.08.05 | 철종 9년 | 숭정대부(崇政大夫) |
1859.02.10 | 철종 10년 | 병조판서(兵曹判書) |
1859.08.25 | 철종 10년 |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
1859.10.17 | 철종 10년 | 형조판서(刑曹判書) |
1859.11.17 | 철종 10년 | 공조판서(工曹判書) |
1860.01.02 | 철종 11년 | 병조판서(兵曹判書) |
1862.08.07 | 철종 13년 | 공조판서(工曹判書) |
1864.01.25 | 고종 1년 | 이조판서(吏曹判書) |
1865.02.27 | 고종 2년 | 좌찬성(左贊成) |
1865.03.03 | 고종 2년 | 좌의정(左議政) |
1865.05.15 | 고종 2년 |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
1867.03.15 | 고종 4년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
1867.05.18 | 고종 4년 | 영의정(領議政) |
1874.11.08 | 고종 11년 |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
1879.08.15 | 고종 16년 | 졸기(卒記) 영돈녕부사 김병학(金炳學)이 졸하였다. 전교하기를 "이 대신은 곧고 단아한 자태와 크고 뛰어난 기량에 문장과 경제(經濟)의 재주를 겸하였기 때문에 맡은 임무가 매우 중하였다. 내가 즉위한 뒤 심증을 살펴서 대신의 임무를 맡기고 수공지치(垂拱之治)가 이루어지기를 바란 것이 거의 10년에 가깝다. 동인협공(同寅協恭)하고 나의 부족한 점을 보필하여 시종일관 성의를 다하였으니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잊는 그 노고가 과연 어떠했겠는가? 근래에 관직을 벗고 한가하게 지내게 되니 벌써 조정과 재야(在野)의 기대가 어그러졌다. 나이가 노쇠하지 않고 정력도 강건해서 아직까지는 다시 등용할 날이 있으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홀연히 뜻밖의 병으로 갑자기 부음 단자를 받게 되었으니 노성(老成)의 전형(典刑)이며 숙달한 재능을 지닌 그가 이제는 없으니 어디서 다시 보겠는가? 절통한 슬픔을 뭐라 말을 할 수가 없다. 졸한 영돈녕부사의 상사(喪事)에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실어 보내고 상복일에는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며 시호(諡號)의 은전은 행장(行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지 말고 거행하고 녹봉은 3년 동안 그대로 실어 보내라. 예장(禮葬) 등의 절차는 관례에 비추어 거행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졸한 영돈녕부사의 성복일에는 승지를 보내어 좌의정을 위문하라." 하였다. |
1879.08.29 | 고종 16년 | 시호(諡號) 문헌(文獻) 勤學好問(근학호문) 嚮忠內德(향충내덕)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남에게 묻기를 좋아함이 문이요충성을 다하고 안으로 덕이 있음이 헌이다. |
문정공(상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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