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부사(宣川府使)  익순(益淳)









[무과] [무과] 정조(正祖) 13년(17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원방(原榜) 병과(丙科) 7위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1787.08.07정조 11년선전관(宣傳官)
1789..정조 13년무과(武科)정조(正祖) 13년(178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원방(原榜) 병과(丙科) 7위(61/437)

1792.08.03정조 16년훈련부정(訓鍊副正)
1792.12.18정조 16년단천부사(端川府使)
1796.07.19정조 20년훈련정(訓鍊正)
1800.12.02순조 즉위년우림장(羽林將)
1801.03.13순조 1년경흥부사(慶興府使)
1804.12.21순조 4년경원부사(慶源府使)
1808.06.21순조 8년오위장(五衛將)
1810.01.17순조 10년선천부사(宣川府使)
1812.01.09순조 12년홍경래난\"청북(淸北)의 직로(直路)에 있는 고을의 사정을 정탐해 왔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선천(宣川)의 장교(將校) 유문제(劉文濟)·최봉관(崔鳳寬) 등이 적장을 맞아들이자, 부사(府使) 김익순(金益淳)은 검산성(劍山城)으로 가서 성가퀴를 지키고자 하였으나, 백성들이 모두 도망해 흩어졌기 때문에 마침내 적도들에게 잡혔습니다. 그의 밀부(密符)와 인월(印鉞)을 빼앗고는 칼을 씌워 옥중에 가두어 놓았다가 이틀이 지난 뒤 들어오라고 청하고는 술을 대접하며 군관(軍官)으로서 영(令)을 전하게 하였으나, 병을 핑계대고 따라가지 아니하니, 우선 고을 아래에 머물러 있게 하였다 합니다. 적들은 유문제와 최봉관을 좌우 익장(翼將)으로 차출하여 고을의 일을 주관하게 하고, 최봉일(崔鳳一)은 선사 첨사(宣沙僉使)로, 고중기(高中起)는 동림 별장(東林別將)으로 차출해 보냈다 합니다. 철산 부사(鐵山府使) 이장겸(李章謙)은 적변(賊變)을 듣고 선천(宣川) 경내로 피해 갔다가 철산의 장교 정복일(鄭復一)에게 잡혀 인부(印符)를 빼앗기고 잠시 보수(保囚)되어 있었다고도 하고, 혹은 억지로 항서(降書)를 바치게 하고서는 적괴가 정복일을 해당 고을의 유진장(留鎭將)으로 삼았다 하기도 합니다. 용천 부사(龍川府使) 권수(權琇)는 처음에 용골 산성(龍骨山城)에 들어가 성을 7일 동안 지키며 단기(單騎)로 겨우 인부를 보존하다가 만부(灣府)로 떠나갔다고 했는데, 이어 해당 부사가 만부에서 성첩(成貼)018) 하여 보고한 글을 받아 보았더니, 정탐한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미 믿을 만한 근거를 잃었으니,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먼저 파출(罷黜)하고 그 죄상을 유사(攸司)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도록 하소서. 또 적도 2명을 잡아 참수하였다 합니다.\"

1812.03.09순조 12년홍경래난모반 죄인(謀叛罪人) 김익순(金益淳)이 복주(伏誅)되었다. 처음에 관서(關西)의 도신(道臣)이 김익순이 적에게 항복하여 첩문(帖文)을 받은 죄를 조사하고 또 함거(檻車)로 압상(押上)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추국을 설시했던 것이다. 결안(結案)에 이르기를, \"적병이 처음 일어났을 때 방어하는 계책을 본받지 않은 채 흉적의 선봉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먼저 항서(降書)를 보냈고, 군관(軍官)의 가짜 첩문을 태연히 받았으며, 인과(印顆)와 부신(符信)을 명령대로 싸보냈습니다. 그리고 날뛰는 마음을 품고 만나기를 청하여 공손히 문안 인사를 나누고, 대청에 올라가 술잔을 주고받았으며, 말미를 받고 돈과 쌀을 받았으니, 나라를 배신하고 적을 따르는 일을 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또 죽음을 면할 계책을 내어 적의 수급(首級)을 사서 수기(手記)를 꾸며 주었으니, 흉악하고 패려한 뱃속이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모반 대역임을 지만(遲晩)합니다.\" 하였으므로, 정법(正法)하였다.

1908.04.30순종 2년복권내각 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이 아뢰기를, \"삼가 지난해 11월 18일의 조칙(詔勅)을 받들고 죄적(罪籍)에 이름이 올라있는 사람들의 죄명(罪名)을 탕척(蕩滌)하는 사안에 대해 여러 번 주하(奏下)를 거쳤습니다. 그 가운데서 관작이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응당 벼슬을 회복시켜 주는 은전(恩典)을 베풀어야 하는데 사안이 오래되다 보니 한꺼번에 모조리 조사할 수 없습니다. 우선 고 좌의정(故左議政) 한효순(韓孝純) 외 77인(人)의 관작을 회복시킬 데 대해서만 상의를 거친 뒤에 개록(開錄)하여 【 좌의정(左議政) 서흥 부원군(西興府院君) 한효순(韓孝純), 영의정(領議政) 정인홍(鄭仁弘),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이조 판서(吏曹判書) 문경공(文敬公) 이현일(李玄逸),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이광좌(李光佐),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조태구(趙泰耉),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조태억(趙泰億),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최석항(崔錫恒), 좌의정 충정공(忠靖公) 유봉휘(柳鳳輝),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중기(金重器), 회인 현감(懷仁縣監) 김도응(金道應), 예조 참판(禮曹參判) 정후겸(鄭厚謙),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하재(金夏材), 좌승지(左承旨) 안기영(安驥泳), 우부승지(右副承旨) 권정호(權鼎鎬), 부호군(副護軍) 조중호(趙中鎬), 선천 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이희화(李喜和),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의징(李義徵), 대사헌(大司憲) 한세량(韓世良), 승지(承旨) 신치운(申致雲), 절도사(節度使) 이징옥(李澄玉), 사옹원 판관(司饔院判官) 원용성(元用星), 감역(監役) 허욱(許煜), 군부 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 이조 참판 이진유(李眞儒), 승지 정해(鄭楷), 예조 참의(禮曹參議) 서종하(徐宗廈),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성시(尹聖時), 대사헌 박필몽(朴弼夢),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 형조 판서 이사상(李師尙), 이조 참의 윤연(尹), 훈련 대장(訓練大將) 윤취상(尹就商), 부제학(副提學) 이명언(李明彦), 보덕(輔德) 김중희(金重熙),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 교리(校理) 윤상백(尹尙白), 지평(持平) 윤지(尹志), 목사(牧使) 이하징(李夏徵), 동부승지(同副承旨) 유수원(柳壽垣), 대사헌 심악(沈), 판윤(判尹) 박찬신(朴讚新), 포도 대장(捕盜大將) 조동정(趙東鼎),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 정언(正言) 이명조(李明祚), 경무사(警務使) 권형진(權瀅鎭), 이조 판서 윤휴(尹鑴),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지평 이동양(李東讓), 정언(正言) 이범제(李範濟), 현감(縣監) 이공윤(李公胤), 승지 이중술(李重述), 진사(進士) 이하택(李夏宅), 승지 이보욱(李普昱), 승지 김호(金浩), 현감 박필현(朴弼顯), 병사(兵使) 박태신(朴泰新), 감역(監役) 정권(鄭權), 부수(副率) 조현빈(趙顯彬), 부사(府使) 심유현(沈維賢), 감사(監司) 권첨(權詹),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사로(李師魯), 밀풍군(密豊君) 이원(李垣), 승지 이재화(李在華), 정언 이우화(李宇和), 주서(注書) 권숭(權崇), 이조 참판 김정관(金正觀), 동부승지 김정리(金正履), 감사 정사효(鄭思孝), 정언 권집(權䌖), 부사(府使) 김주태(金柱泰), 통제사(統制使) 김윤(金潤), 좌부승지(左副承旨) 채동술(蔡東述), 좌의정 박홍구(朴弘耉), 승지 박홍도(朴弘道)이다.】 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윤허한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