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國會議員)  두한(斗漢)


1918년 6월 23일 경성부 종로에서 김좌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후 경기도 개성에서 살았고 외삼촌은 매일 도박을 하고 술을 자주 마시며 집과 땅을 팔고 조카 김두한까지 노예로 팔았고 도망을 갔다. 김두한은 외삼촌이 자신을 팔았다는 사실을 알자 도망을 갔다.



1930년 13세 때 혼자 경성부에 왔으나 외삼촌 때문에 일본 경찰들에게 쫓기다 거지들에게 잡혀 정진영과 함께 수표교 아래에서 형제처럼 살아가다가 형평운동을 하였다고 전해지는 원씨 성의 한 노인 원영기를 만나 17세까지 성장하였다. “왜놈의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 곧 독립하니 그때 공부하라.”는 원 노인의 뜻에 따라 학교는 다니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하였다.



이후 원 노인마저 죽자 김두한은 서울에서 깡패들을 때려눕히며 1935년 나이 18세에 우미관을 장악하였다.[



또한 개인적으로 1930년 후반 배우 김승호 동양극장 극단에 소개하고 곤경에 처한 권투선수 정복수를 도와주었고 종각의 술집에서 일본헌병장교들을 때려눕혀 목숨의 위협을 받았던 레슬링 선수 황병관을 구해주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후 1942년 조선총독부로부터 김두한에게 강제로 징용이 요구되었는데 이 때 그는 조선 총독부와 협상하여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의용정신대)이라는 청년단체를 조직하였고 단장으로 재직 징용 대체 근로활동을 하였다. 한편 1944년 이재희와 혼인하였다.



1945년 해방 이후 김두한은 건국준비위원회 등에 참여하여 용산의 일본군 무기고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활약하였다고 하나 이 시기 김두한의 활동에 대해서는 확실히 검증되는 것은 없다. 하지만 곧 미군정기로 인해 건국준비위원회 등 단체들이 해체되자 김두한은 죽마고우인 친구 정진영의 부탁으로 함께 조선공산당 산하 조직인 조선청년전위대에 가입하였다.



김두한은 노변야화 라디오 방송에서 김일성도 자신을 눈여겨 보았으며 인민군 남조선 사령관 (소장)으로 임명하겠다는 제의도 있었다고 회고하였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김두한은 조선청년전위대를 탈퇴하였는데 그의 전향 원인은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김두한 본인은 부친의 동지였던 이규갑 윤치성 유진산 염동진 박용직이 부친 김좌진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어 탈퇴를 하였다고 밝혔는데 사실관계에 틀린 점이 많아 현재의 역사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부친의 동료였던 이범석 신익희 등 우익 인사들의 지속적인 설득과 본인에게도 우익에서 활동하는 것이 배경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더 좋은 환경이라는 판단 하에 자발적으로 전향하였다는 설이 우세하며 전향 후 염동진이 조직한 백의사에서 비공식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김구 이승만 김규식 명예회장 유진산 회장 그리고 김두한을 감찰부장 겸 별동대 총대장으로 하여 대한민청이 조직되었다. 김두한은 대한민청의 실질적 지도자로서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서 우익의 선봉장 역할을 하면서 산정호수 김일성 별장습격 박헌영 납치미수 국군준비대 습격 학병동맹 습격 전평 본부습격 심영·신불출 습격 과거 친일사업가들의 거금 압수 9월 총파업 등에 활약하였고 김원봉 습격 좌우합작 방해 (여운형 협박 벼랑에서 낙하사건 김규식 협박) 등에도 관여하였다고 뒷날 회고록에서 밝혔다.



좌우합작 방해 이후 경교장에서 김구의 격려와 충고 이후에는 임시정부계열 인물들과 대립이 없었다고 한다.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미군정과 경찰에 잡히면 안심했고 별동대에 잡히면 죽는다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당시 별동대의 활동반경은 북으로는 연천군 남으로는 화성 수원 용인에 이르렀을 정도로 전 경기도를 통틀었다고 한다.



김두한은 좌우대립 과정에서 5회 피습당했다고 하며 이후 계속해서 좌우대립에서 우익의 선봉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청년단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훗날 반민특위의 체포대상이었던 박흥식 등 친일파 자본가들 집에 습격하기도 했다고 하며 1원도 사사로운 곳에 쓰지 않았다는 근거로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자신의 집을 저당과 이승만의 친필 휘호를 보여주며 영수증을 썼다고 회고록에서 밝혔다.



1947년 대한민청에서 조선공산당 소속 전위대장 정진영을 살해한 사건이 계기가 되어 미군정 의해 포고령 위반 및 살인죄로 체포되었고 사형을 선고받았다. 3심 판관이 사퇴제출하는 등 재판 과정에서도 좌우간에 대립이 극심하였고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1948년 3월 24일 지청천 이범석 등이 존 하지에게 진정하는 등 그의 구명운동을 벌였다.



사형선고를 받고 집행을 기다리는 중이었던 김두한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제1공화국 출범으로 인해 사건이 미군정에서 대한민국 검찰로 이관되었고 곧 석방되었다. 그 후 대한청년단의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노동운동가로서도 활동했으며 우익 활동 또한 계속되었다. 이승만 정부에 의해 암살 대상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김구의 암살 시기 이전인 1949년 6월 17일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 등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김두한은 과거 별동대의 대원으로 추정되는 4명에게 극적으로 배를 구해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이후 인민군과 전투를 벌이며 계속 남하하여 부산에 도착하였는데 그의 회고록에는 그 당시에 부산에 피난해 있던 고위층이나 사회 유력인사들의 행태에 큰 실망을 느끼고 그들을 응징했다고 하는 부분이 보인다. 그후 노동자 인권 증진 관련 활동에도 관심을 보였다고도 전해진다. 노변야화 라디오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이 그에게 내무부장관을 주겠다는 제의를 하였으나 본인이 거절했다고 한다.



또한 이승만이 학도병을 이끌고 낙동강 전투에 크게 활약한 김두한을 국민방위군 사령관(육군 준장)으로 제의하고 임명해주겠다고 했으나 김두한 본인은 사관학교 출신도 아니고 군대 경험이 없다고 해서 거절했다. 또한 전쟁 중에 전선에 젊은 군인들이 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데 신나는 노래를 틀고 남녀가 춤을 추는 카바레는 있을 수 없다며 모든 부산의 카바레의 폭력배들을 구타하고 카바레를 폐업을 했다.



김두한은 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종로구 을구 4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법조인 한근조와의 근소한 차이로 승리 당선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에서 이승만의 종신제를 위한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김두한은 이승만 정부를 비판한 혐의로 선거법 위반과 정치권력으로 멋대로 행패부리는 부하 김관철 살해미수로 구속되었는데 자유당 입당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승만 이기붕과는 정치노선을 달리 하였으며 자유당 의원총회에서는 이승만 종신집권 추진 핵심인물에 한 명이었던 장경근에게 주먹을 날리기도 했다.



그 후 1954년 7월 16일에 판잣집철거에 관한 청원에 참여하였다.이승만 3선 개헌한 때는 개헌한 공고 서명을 거부하였고 국회에서 1954년 11월 27일 비밀투표를 한 결과 재적의원 203명 참석의원 202명 중 찬성이 135표 반대가 60표 기권이 7표로 1표 차로 부결을 선포했으나 자유당은 사사오입 개헌을 일으켰다. 이 사건에서 개헌 반대 투표를 던진 의원들은 자유당에서 제명조치되어 탈당당하였고 이후 김두한은 무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56년 1월 진보당추진위원회에 조직부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부흥주택대지 2중 매매 혐의로 시경에 내사받았고 진보당을 탈퇴하였고 곧 노농당으로 옮겼다.



계속 이승만 정부에 대해 비판하였고 그 과정에서 이정재에게 국회 휴게실에서 권총으로 협박을 당했으나 김두한은 이정재를 호통쳤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야당은 테러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결성하려고 했으나 당사자 김두한은 야당의 결성을 반대하였고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고 주장했던 후문이 전해진다.



1956년 7월 27일 지방선거 입후보 방해에 대한 야당 국회의원들이 거리시위를 한 7.27 데모사건에서 김종원 치안국장의 지휘하에 거리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시가행진 이후 김두한 등 야당 의원 15명은 이기붕 의장 사직권고결의안을 제출하였다. 계속해서 이승만 정부를 비판하였고 그 일로 1956년 10월 5일 이승만을 민족반역자라고 비판한 국가원수모독죄로 의원징계처분을 받았다.1956년 10월 13일 배재학원 운동장에서 열린 제1차 여야 민의원 친선 야구대회에 참가하였다.



1957년 5월 25일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야당 시국강연회에서 경호총책임자를 맡았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3대 국회 당시 한국불교태고종 대한불교조계종 대립에서 비구승을 옹호하여 종로구에 대처승의 본부를 두고 있던 종교 인사들에게 탄압을 받았으며 게다가 자유당을 한 경력 자잘한 폭행 사건과 말실수 등으로 구민들의 신뢰를 잃어 대한민국 제4대 국회 종로구에서 노농당 후보 대한민국 제5대 국회 충남 홍성에서 무소속 6대 국회 종로구에서 무소속 등 연이어 낙선하였다.



이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 선거운동에 참여하였고 전국고학생연맹 등 고학생들을 지원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하며 신기범 이찬오 등 학생들과 교류하였다. 4.19혁명 이후 남산의 이승만 동상을 철거하였다



1960년 8월 장면이 차기 총리로 유력시되자 그가 친일파였다는 소문이 다시 확산되었다. 8월 19일 국회에서 장면의 총리 지명동의안 표결이 있기 전 김두한은 여의도 국회의사당에 나타나 장면의 친일경력을 문제삼았다. 김두한은 장면에게 역사적인 귀한 표를 던져서는 안된다는 내용과 장면의 창씨개명을 적은 문건을 뿌리고 장면을 국무총리로 뽑는다면 의사당을 불살라 버리겠다고 외쳤으나 사전 제지당했고 장면의 총리 인준안은 무난히 통과되었다. 총유효득표수 225표 중 찬성 117 반대 107 기권 1로 정족수를 채우고 총리에 피선되었다.



5·16 군사정변 이후 1962년 3월 1일 독립유공자들에게 건국훈장을 수여식이 있었는데 김두한은 부친 김좌진을 대신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받았다. 일각에서는 그 역시 독립운동가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의 조직 폭력배와 결투한 것은 독립운동과는 무관하다는 비판 여론이 나오면서 사라졌다. 이후에 김두한은 5·16 군사 정변에 대해 관망하는 입장이었으나 군의 원대 복귀한다는 공약을 믿고 애국단을 조직하였으나 곧 해체되었다.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등으로 보궐선거에서 용산구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6년 1월 8일에 5단계 혁명 계획을 수립하고 정부 전복을 기도하였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1월 29일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 석방 결의안이 통과되었고 4월 28일에 5년을 구형받은 이후 5월 10일에 김두한을 비롯한 모두 전원 무죄 선고되었다.



이후 김두한은 용산에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서울시장과 만나 봉천동에 터를 마련해서 생계를 이주시키게 하였고 판잣집 철거 문제와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앞장서기도 했다고 한다.



1966년 9월 22일 한국 비료 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으로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 중 무소속 김두한은 국회발언대에서 발언했는데 발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병철이 밀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환경을 조성해 줬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파괴하고 재벌과 유착하는 부정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현 정권을 응징하고자 한다.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선 너희들이 밀수한 사카린 맛을 봐라.”



라고 비판하며 국무위원 등에게 미리 준비한 똥물을 투척하였다.



이후 이병철 한국비료 사장(삼성그룹 회장)은 사카린 밀수사건과 관련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언론 및 학원 사업에서 손을 뗄 것을 선언하였다. 그 후 이병철 사장은 헌납 교섭을 맡았던 장기영 부총리가 해임되자 개각 1주일 만인 1967년 10월 11일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김두한은 국회의원직을 잃고 구속기소당하였고 정부는 김두한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하지만 김두한의 편을 드는 여론이 절대다수였으며 이 기세로 그는 제2당인 신민당에도 영입되었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다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두한은 대한민국 제7대 국회 선거 때 경기도 수원시(당시 수원시는 오늘날 화성시와 용인시의 일부를 포함) 중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깃불 비교 발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선거에도 낙선하였다. 서대문 형무소 교도관 서윤환은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된 그날 저녁 김두한 씨가 비에 젖은 채 감방에 왔는데 손과 발에 수갑이 채워져 있었다. 온몸이 피멍 투성이였다.”고 하며 그 다음 날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돌아와서는 “서 동지 나 죽을 뻔했어”라며 웃을 뿐 불만은 토로하지 않았다고 말하였다.이후 석방된 김두한은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였다.



석방 이후 노동운동 광산업 사업 대학생들과 교류 등의 활동을 하며 재야인사로 살아가다가 1972년 11월 19일 그의 후계자 조일환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 길가에 쓰러져 11월 21일 오전 9시 5분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무허가 자택에서 향년 55세의 나이로 오랜지병이였던 고혈압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대부분의 언론에는 김두한의 일대기에 대하여 협객 등의 표현을 써가며 긍정적인 논조로 쓰여진 기사들이 게재되었다. 그리고 윤치영 민관식 등 여야를 가리지 않고 많은 정치계 인사들이 조문하였으며 탤런트 김을동 등 2남 1녀를 두었다.장례는 조시원이 장례위원장으로 광복장으로 치렀다.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1972년 11월 21일은 박정희 정부가 유신헌법 찬반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압도적인 지지로 유신헌법을 확정한 날이다.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1954.05.20국회의원(國會議員)
3대
1965.11.09국회의원(國會議員)
6대

안동김씨대종중
문충공(상용)파
두한(斗漢)
호(號)의송(義松)
생(生)1918년 무오(戊午) 5월 15일
경력(經歷)국회의원(國會議員)
졸(卒)1972년 임자(壬子) 11월 21일
묘(墓)신세계(新世界) 공원묘지(公園墓地)
배(配)전주이씨(全州李氏)
생(生)1924년 갑자(甲子) 3월 4일
 부(父)건응(健應)
배(配)김해김씨(金海金氏)
생(生)1916년 병진(丙辰) 10월 26일
 부(父)병국(炳國)
24 세25 세26 세27 세28 세
병태(炳泰)형규(衡圭)경진(景鎭)
좌진(佐鎭)두한(斗漢)경동(慶東)
현동(賢東)
범동(範東)
을동(乙東)
영채(令彩)
철한(澈漢)원동(元東)
동진(東鎭)문한(文漢)일동(日東)
성동(星東)
영동(暎東)
무한(武漢)호동(虎東)
준동(晙東)
욱동(旭東)
양동(暘東)
석동(奭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