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좌진(佐鎭)


자는 명여(明汝) 호는 백야(白冶). 충청남도 홍성 출신. 아버지는 김형규(金衡奎)이다.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 슬하에서 성장하였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영민하고 공부보다는 전쟁놀이와 말타기를 좋아하였다. 15세 때인 1904년에는 대대로 내려오던 노복 30여 명을 모아놓고 그들 앞에서 종문서를 불에 태우고 농사를 지어먹고 살 만한 논밭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1905년 서울로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1907년 향리로 돌아와서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가산을 정리해 학교 운영에 충당하게 하고 90여 칸의 자기 집을 학교 교사로 제공하였다.그리고 홍성에 대한협회와 기호흥학회의 지부를 조직해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09년 『한성신보』 이사를 역임하였다.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과 서북학회를 세우고 산하교육기관으로 오성학교(五星學校)를 설립해 교감을 역임하였다.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협력하였다.



1911년에 북간도에 독립군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조달 차 돈의동(敦義洞)에 사는 족질 김종근(金鍾根)을 찾아간 것이 원인이 되어 2년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1916년 노백린(盧伯麟)·신현대(申鉉大) 등과 함께 박상진(朴尙鎭)·채기중(蔡基中) 등이 결성한 광복단에 가담해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18년 일본의 감시를 피해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3·1독립선언에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서에 39명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그리고 서일(徐一)을 중심으로 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에 가담해 군사 책임을 맡고 정의단을 군정부(軍政府)로 개편한 다음 사령관으로 추천되었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권고를 받아들여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로 개칭하고 소속 무장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우선 독립군 양성을 위해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 산곡에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였다. 스스로 소장이 되어 엄격한 훈련을 시키면서 무기 입수에 전력하였다.



1920년 9월 제1회 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배출시켰다.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백두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靑山里)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가 시작되었다.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같은 달 26일 고동하전투를 끝으로 청산리전투가 전개되었으며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 휘하 부대가 서로 합동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3 000여 명을 살상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특히 김좌진 장군 휘하의 북로군정서군은 백운평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등에서 큰 전승을 거두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전술전략이 기적과도 같은 승리를 거두어 독립전투상 금자탑을 세운 것이다.



그 뒤 북진을 강행하며 그 해 말에 러시아와 인접한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하였다. 집결한 10여 개의 독립군단체가 통합 대한독립군단이 결성되자 부총재로 취임하였다. 약소민족의 독립을 원조한다는 레닌정부의 선전에 한가닥 희망을 걸고 많은 사람이 북쪽 러시아로 넘어갈 때 김좌진도 우수리강을 건넜다.그러나 생각한 바 있어 만주로 되돌아와 흩어진 동지들을 재결합해 대기하다가 1925년 3월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다. 또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때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무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독립군 양성에만 전념하였다.1927년 많은 간부가 일제에 붙잡히자 신민부를 재정비해 중앙집행위원장으로서 신민부를 통솔하였다. 1929년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국총연합회(韓國總聯合會)가 결성되자 주석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앞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김좌진기념관(金佐鎭記念館)

중국 흑룡강성 목단강시 해림시 해림진 해랑로 과기원구 5호

한중 우의 공원에 김좌진(金佐鎭 1889.11.24 ~ 1930.1.24) 장군의 기념관이 있다. 백야 김좌진 장군 기념 사업회에서 국가 보훈처와 공동으로 설립하였다. 양국 간의 우호 증진과 김좌진의 역사적 평가 부각 양국 국민의 애국주의의 교육의장 양국의 항일전쟁에 대한 공감대 형성 해림시의 경제적인 발전 해림시 문화 및 휴식 공간 활용 등의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2003년 10월에 완공되었으며 5000여 평의 대지 위에 1 300여 평의 연면적을 가진 복합 문화 기념관이다. 270평의 상설전시장과 연수원 숙소 등 각종 부대시설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다목적 홀을 갖추었다. 김좌진의 영정과 청산리 전투 보고서 등 당시 독립군과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김좌진 장군 기념관에는 민족의 자주적 독립을 위하여 끝까지 투쟁해 온 항일 독립운동가들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다. 더불어 중국 항일 운동가들을 기념하기 위한 사진과 자료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2014년에는 한·중 수교 16주년을 맞이하여 한국과 중국 간의 발전적인 우호 관계와 양국 간의 친선 외교 및 경제 교류 활성화를 위한 전시관도 마련하였다. ,

김좌진묘(金佐鎭墓)

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1 일원
도기념물 제73호 (1989년 12월 29일)

장군(將軍)의 유해(遺骸)는 만주땅에 임시암매장(臨時暗埋葬) 되었다가 부인(婦人) 오숙근(吳淑根) 여사(女史)에 의해 조국(祖國)에 묻힌다.
이때가 1940년 9월 밀감상자에 장군의 유해를 위장하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安葬). 1957년 부인(婦人)이 타계(他界)하자 장군(將軍)의아들 김두한(金斗漢)은 현(現) 묘소(墓所)로 이장(移葬)하였다.,

김좌진장군생가(金佐鎭將軍生家)

충청남도기념물 제76호.
충남 홍성군 갈산면 백야로546번길 12 행산리

김좌진장군 생가지 성역화사업은 1989년부터 시작하여 10년 만인 1998년 1월 생가지 및 기념관까지 완공되어 충의정신(忠義精神)의 계승 발전을 위한 산 교육장으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가옥은 안채와 사랑채·광이 따로 있고 밖에는 마구간이 있다. 안채는 앞면 8칸·옆면 3칸의 기와집으로 서쪽을 향하고 있다. 왼쪽부터 2칸 부엌이 있고 아랫방과 윗방 각 한 칸씩 있으며 통칸의 대청이 있다. 그 위에 방이 한 칸 있고 끝으로 툇마루가 있다. 방 앞으로 툇마루가 있는데 맨 끝방 주위에는 툇마루를 한 칸 높여 누각처럼 만들었다. 마당 한쪽에 우물이 있으며 밖에 있는 마구간은 화장실과 마구를 3칸 집에 만들었다.

터만 남아 있던 곳에 1992년에 안채와 문간채 사랑채를 복원하였다.

생가터 네에는 기념관 사당 비등이 있다.

백야사(白冶祠)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백야장군의 생가터 기념관 뒤쪽에 장군을 모신 사당이 있다. ,

1962..독립운동(獨立運動)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안동김씨대종중
문충공(상용)파
좌진(佐鎭)
자(字)명여(明汝)
호(號)백야(白冶)
생(生)1889년 기축(己丑) 11월 24일
상훈(賞勳)건국훈장 대한민국장(一九六二년)
 청산리전투지휘
졸(卒)1930년 경오(庚午) 1월 24일
묘(墓)충남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1장군(將軍)의 유해(遺骸)는 만주땅에 임
 시암매장(臨時暗埋葬) 되었다가 부인(婦人) 오숙근(吳淑根) 여사(女史)에
  의해 조국(祖國)에 묻힌다.이때가 1940년 9월 밀감상자에 장군의 유
 해를 위장하여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에 안장(安葬). 1958년 부인(婦人
 )이 타계(他界)하자 장군(將軍)의아들 김두한(金斗漢)은 현(現) 묘소(
 墓所)로 이장(移葬)하였다.
배(配)해주오씨(海州吳氏)
생(生)1887년 정해(丁亥) 4월 3일
졸(卒)1958년 무술(戊戌) 1월 15일
합폄(合窆)
 부(父)부사(府使) 일영(鎰泳)
 조(祖)봉사(奉事) 문선(聞善)
 증조(曾祖)치극(致克)
 외조(外祖)정돈시(鄭敦始) 본(本) 온양(溫陽)
배(配)나주나씨(羅州羅氏)
생(生)1901년 신축(辛丑) 9월 12일
 부(父)병수(炳洙)
23 세24 세25 세26 세27 세
윤근(潤根)병태(炳泰)형규(衡圭)경진(景鎭)
좌진(佐鎭)두한(斗漢)
철한(澈漢)
동진(東鎭)문한(文漢)
무한(武漢)
병주(炳㴻)
이호원(李鎬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