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녕위(東寧尉)  현근(贒根) |
동녕위 김현근은 김한순의 아들로 순조의 장녀인 명온공주의 남편이다. 명온공주는 1810년(순조 10년) 음력 10월 13일 조선의 제23대 왕인 순조와 순원왕후의 장녀로 태어났다. 문조(효명세자)의 친동생이며 복온공주와 덕온공주의 친언니이다. 덕온공주의 모후 순원왕후는 안동 김씨 출신으로 김조순의 딸이다. 순원왕후는 자신의 집안이 풍양 조씨 가문과 함께 조선 말기 세도 정치의 절정기를 이끌어 나가게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왕비이기도 하다. 8살 때인 1817년(순조 17년) 음력 5월 11일 정식으로 공주에 봉해져 명온공주(明溫公主)라 하였다. 이후 1823년(순조 23년) 음력 5월 10일 명온공주의 부마를 간택하기 위해 전국의 12세부터 15세까지의 남자들에게 금혼령을 내렸으며 이 해 음력 6월 2일 진사를 지낸 안동 김씨 김한순의 아들이자 명은공주와는 동갑내기인 김현근을 부마로 정하고 동녕위(東寧尉)에 봉했다. 그리고 음력 7월 20일 명온공주와 김현근의 가례가 열렸다. 명온공주가 궁궐 바깥에 새로운 살림을 꾸리게 되자 1824년(순조 24년) 음력 9월 8일에는 효명세자가 공주의 집에 다녀갔고 1826년(순조 26년) 음력 3월 28일에는 대신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순조와 효명세자가 함께 직접 공주의 집에 행차하였다. 동녕위와 명온공주는 죽도궁(竹刀宮)에서 살았다. 김현근이 꽤 큰 병에 걸렸을 때 무당들이 쾌유를 기원하는 굿을 하면서 대나무 칼춤을 추었고 다행히 김현근이 완치된 일화에서 유래하였다. 나중에 죽동궁으로 변했으며 동 이름도 죽동(竹洞)이 되었다. 1830년(순조 30년) 음력 5월 6일 오빠 효명세자의 죽음에 이어 1832년(순조 32년) 음력 5월 12일 명온공주의 바로 아랫동생인 복온공주가 혼인 2년만에 15세의 어린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리고 겨우 한 달이 지난 음력 6월 13일 명온공주도 오랜 투병생활 끝에 23세의 나이로 사망하고 말았다. 당시 순조는 장례를 복온공주의 예에 맞춰 진행하도록 하고 직접 명온공주의 집에 행차하였다]. 한편 명온공주의 남편인 김현근은 1868년(고종 5년) 음력 8월 26일 사망하였다. 김현근에게는 사후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
1823.10.20 | 순조 23년 | 부마 동녕위(東寧尉) |
1829.07.24 | 순조 29년 | 빙고제조(氷庫提調) |
1832.02.28 | 순조 32년 | 제용제조(濟用提調) |
1837.03.10 | 헌종 3년 | 주청겸사은사(奏請兼謝恩使) |
1846.07.12 | 헌종 12년 | 동지겸사은사(冬至兼謝恩使) |
1855.04.20 | 철종 6년 | 장흥제조(長興提調) |
1864.02.20 | 고종 1년 | 내의제조(內醫提調) |
1865.08.04 | 고종 2년 | 사직제조(社稷提調) |
1865.10.01 | 고종 2년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
1866.04.13 | 고종 3년 |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
1868.08.26 | 고종 5년 | 증(贈)영의정(領議政) |
1868.08.26 | 고종 5년 | 졸기(卒記) 동녕위(東寧尉) 김현근(金賢根)이 죽었다. 전교하기를, \"이 도위(都尉)는 순묘(純廟)의 의빈(儀賓)으로서 네 조정에 걸쳐 은혜를 후하게 받았으며, 조심하고 삼가는 것으로 평생의 신조로 삼았음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근래에 와서는 자신을 지키고 나서지 않는 탓에 오랫동안 서로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뜻하지 않게 한 번 병이 들어 문득 세상을 떠났으니, 지나간 일을 돌이켜봄에 슬픔을 금할 수 없다. 전 동녕위의 집에 중사(中使)를 파견하여 호상(護喪)을 보게 하고, 의절을 전례에 비추어 거행하라. 그리고 동원부기(東園副器) 1부(部)를 실어 보내고, 성복(成服)하는 날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며, 3년간 녹봉을 별도로 지급하라.\" 하였다. 이어 전교하기를, \"전 동녕위에게 영의정(領議政)을 증직하는 의전을 당일로 거행하라.\" 하였다. |
문충공(상용)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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