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장(義兵將)  인상(麟祥)


1557년(명종 12)∼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 의병. 자는 시백(時伯)이고 호는 학산(鶴山)이다.



부친은 김이(金頤)이다.



집안이 가난하였으나 웃어른 섬기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독서에 충실하였다. 단아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인해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왜구의 노략질에 분개하여 의병장 월천(趙穆) 유종개(柳宗介)와 의병을 일으켜 경상북도 춘양(春陽) 노루재[獐峴]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묘는 처음에는 경상북도 풍산(豊山)에 있었으나 후에 경상북도 상주(尙州)로 이장하였다.



문집으로 『학산실기(鶴山實紀)』가 전한다.

김응조(金應祖)의 학사집(鶴沙集)에 실려있는 행장

萬曆壬辰年。島夷竊發。三京失守。乘輿播越。義士安東金公。慨然謂其內相裵氏曰。善護養吾老父。吾已決死於義。遂與正字柳公宗介。倡起義旅。遮截北來諸賊于安東小川縣之獐峴。兵敗被擒。脅誘不屈。至臠身剝面。猶奮罵不已。遂遇害縣首于樹。實七月二十九日。時年三十六。裵氏購得公屍於積屍中。權厝豐山小異洞。後遷鶴駕山竹田洞午向原。嗚呼。公諱麟祥。字伯仁。生於弘治丁巳。有異質。稍長。家貧好讀書。親舊賙窮不受。勵操益苦。鄕黨服其行義。西厓柳先生嘗亟稱之。當其八路刳於兵。列郡無男子。公以年少白面書生。誓死討賊。家人泣諫而不顧。肢體虀粉而不挫。終能成就一箇義字。使鶴山一髮。萬古靑未了。嗚呼烈哉。事聞。朝廷褒其節義。復其戶。旌其閭。又命錄其事于三綱行實。獨無贈典。士林惜之。公高麗太師諱宣平之後。高祖諱永銖。司憲府掌令。曾祖諱玽。祖諱生河。考諱頤。皆隱不仕。妣全義李氏。諱瓘之女。裵氏籍興海。考諱天佑。一男曰以榴。有一女。適金應熽。四男。益善,益儉,益淳,益敏。內外曾孫男女若干人。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김인상정려각(金麟祥旌閭閣)

창녕군 부곡면 거문리

임진왜란시 봉화 노루재 전투에서 순의(殉義)하신 충의사(忠義士) 학산(鶴山) 인상(麟祥)공의 정려각

봉화충렬사(奉化忠烈祠)

봉화군 소천면 현동리

임진왜란시 의병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곳으로 구전(苟全) 중청(中淸) 학산(鶴山) 인상(麟祥)공등이 합사 되어 있다. ,

삼강당(三綱堂)

안동시 풍산읍 상리

충의사 김인상 효자 김시좌(金時佐) 김사리(金士利) 권순(權詢) 권강(權杠) 정헌(鄭憲) 열부(烈婦) 김씨(金氏) 등을 모신곳이다. ,

학산실기(鶴山實記)

임진왜란 때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킨 충의사(忠義士) 김인상(金麟祥)의 실기. 1732년(조선 영조 8) 간행 목판본. 1책. 11세손 영진(泳鎭) 등이 수집 ·편집하여 1732년(영조 8)에 간행하였다.
내용은 행장(行狀) ·행적(行蹟) ·서행적후(書行蹟後) ·사림소초(士林疏抄) ·정충각중수기(旌忠閣重修記) ·정려기후발(旌閭記後跋) ·정충각실적 ·정충각서 ·정각발 ·봉판고유문(奉板告由文) ·통문 ·상량문 ·묘갈명(墓碣銘) ·사실(事實) 등이 수록되어 있다.
책머리에는 충의사 김인상 효자 김시좌(金時佐) ·김사리(金士利) ·권순(權詢) ·권강(權杠) ·정헌(鄭憲) 열부(烈婦) 김씨(金氏) 등을 모신 삼강당(三綱堂)의 사적과 삼강당기 ·서유적후(書遺蹟後) ·삼강당상량문 ·중수시사림통간(重修時士林通簡) 및 선조의 사만(賜輓) 등이 첨부되어 있다.
책머리에 조유찬(曺有贊)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으며 책끝에 12세손 정한(鼎漢)과 11세손 영진의 발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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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5.07.14광해 7년
사헌부가 《삼강행실》에 임진년 경상도에서 창의한 유종개의 별전을 마련토록 청하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삼가 충절(忠節)에 대해 포상하는 것은 신민(臣民)들을 격려하는 크나큰 거조입니다. 국가에서 국(局)을 설치하고서 찬집(纂集)하는 뜻이 어찌 범연한 것이겠습니까. 그런데 그 사이에 소루함을 면치 못하고 있는바 우선 신들이 눈으로 본 것을 가지고 말해 보겠습니다. 증 예조 참의 유종개(柳宗介)는 본래 유신(儒臣)으로서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었고 겸하여 병서(兵書)를 읽었는데 시변(時變)에 강개하여 임진년에 경상도에서 앞장서서 창의(倡義)해 동지들을 규합한 다음 대략 대오를 편성하였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왜적을 만나 화살과 돌이 쏟아지는 와중에 마침내 유생 윤흠신(尹欽信)·윤흠도(尹欽道)·김인상(金麟祥) 등과 함께 왜적의 칼에 죽었습니다. 이에 당시에 보고 들은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고 애처로워하였으며 일을 아룀에 이르러서는 조정에서 즉시 포증(褒贈)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만든 《삼강행실(三綱行實)》 가운데에는 단지 윤흠신 등 세 사람만 한 전(傳)에 합쳐 기록하면서 ‘대장 유종개와 함께 죽었다.’고 하였으며 유종개에 대해서는 별도로 전이 없습니다. 이는 필시 당초에 문적(文籍)이 산실되어서 그런 것입니다. 별도로 그의 전을 만들고 유종개 이하 네 사람이 살던 마을에다 정문(旌門)을 세우소서." 하니 왕이 따랐다.

안동김씨대종중
사직서령공(생하)파
인상(麟祥)
자(字)시백(時伯)
호(號)학산(鶴山)
생(生)1557년 정사(丁巳) 월 일
 임진왜란때 춘양에 거주하다 유종개등과 창의하여 적병을 토벌하다가 장현(獐
 峴)에 진을 치고 전투하다 패하여 포로가 되었으나 굽히지 않자 신체에 살
 점을 찍어 내고 얼굴을 깎아 내리는 고문을 당하여 죽음에 이르렀으나 계속
  꾸짖다가 을미년 7월 29일 운명하였다 이소식을 듣고 삼강록 충신전에
 새기게 하고 정려케 하였다 안동 삼강 별사에 모시고 제향케 하였다. 김학
 사(金鶴沙) 응조(應祖) 가 행장을 짓고 서애(西崖) 유성룡(柳成龍)이
 의적을 기록하였다
배(配)흥해배씨(興海裵氏)
졸(卒)1607년 정미(丁未) 9월 12일
묘(墓)풍산 현북 죽전동
자좌(子坐) 합폄(合窆)
 임진년 부터 병술년 봄까지 三五四년간 영산면봉암리에 있는 학산재(鶴山齋)
  를 철종임자(哲宗壬子) 에 창녕군 부곡면거문리로 이건(移建) 토록하여
 족후손 문정공(文正公) 수근(洙根) 이참(吏叅) 김재전(金在田) 이발문(
 跋) 하여 비석을 다시 세웠다 묘갈명(墓碣銘) 은 서파(西坡) 류필영(柳
 必永) 이짓고 종후손 목산(牧山) 병현(炳鉉) 기문을 쓰고 각재(覺齋)
 권삼현(權@@鉉) 기문(記) 을 썼다. 一九九七년三월九일 영산면 서리비파
 산 . 지원으로 면례(緬禮) 하고二00九년기축七월二十八일 거액의 국비를
 보조받아 봉화군 소천면 소재 뒷산 의총 및 사당인 충렬사를 준공하여 매년
  음七월二十八일 제향을 받들고 있다 .
12 세13 세14 세15 세16 세
순(珣)생하(生河)이(頤)인상(麟祥)주(籒)
인서(麟瑞)경득(慶得)
김흥업(金興業)
호(顥)인지(麟趾)시진(始振)
원순(元順)
조승서(趙承緖)
고경운(高慶雲)
생명(生溟)현(顯)계종(繼宗)명원(鳴遠)
진원(震遠)
중원(重遠)
금상현(琴尙鉉)
부(頫)계현(繼賢)기원(期遠)
성원(聲遠)
박혁(朴㷜)
김지하(金支厦)
김이명(金以鳴)
이광전(李光前)
황기(黃琦)
김언진(金彦璡)
강여해(姜汝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