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獨立運動家)  병수(炳秀)


김병수(金炳秀)는 김찬근(金瓚根)과 진성이씨(眞城李氏) 사이에서 1879년 경북 문경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字)는 덕진(德眞)이고 호(號)는 해선(海仙)이다.



1919년 4월 15일 신북면 갈평(身北面葛坪) 장날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평소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고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자 이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그는 1908년(융희 2) 의병대장 이강년(李康秊) 휘하의 선봉장에게 자신의 재산을 처분한 돈을 군자금으로 제공한 후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문경으로 이사하였다.



그후에도 항상 독립을 염원하여 오다가 1919년 4월 15일 오후 8시경 신태인(申泰仁)과 함께 도로 보수를 위해 나온 부역 인부 40여명을 규합하여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 3명이 와서 총검으로 위협하며 해산토록 하였으나 계속 독립만세를 외치고 이에 대항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결국 이해 5월 12일 대구지방법원 상주(尙州)지청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8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1980..독립운동(獨立運動)대통령표창

1990..독립운동(獨立運動)건국훈장 애족장


안동김씨대종중
생원공(극례)파
병수(炳秀)
자(字)덕진(德眞)
호(號)해선(海仙)
생(生)1879년 기묘(己卯) 3월 13일
상훈(賞勳)건국훈장 애족장
 독립을 염원하다가 3·1운동이 일어나자 1919년 4월 15일 갈평(葛坪
 ) 장날에 도로 보수를 하던 인부 40여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
 하였다. 일본 경찰의 저지에도 계속 만세를 부르며 대항하다가 체포되어 옥
 고를 치렀다.
졸(卒)1944년 갑신(甲申) 8월 21일
묘(墓)문경(聞慶) 마성면(麻城面) 성주봉하(聖主峯下)
건좌(乾坐)
배(配)야성송씨(冶城宋氏)
생(生)1878년 무인(戊寅) 월 일
졸(卒)1962년 임인(壬寅) 8월 2일
합폄(合窆)
 부(父)인석(寅錫)
 조(祖)재민(在民)
 증조(曾祖)경환(庚煥)
 외조(外祖)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권구연(權九淵) 본(本) 안동(安東)
21 세22 세23 세24 세25 세
이은(履殷)소순(素淳)
기순(氣淳)찬근(瓚根)병희(炳禧)용규(龍圭)
봉규(鳳圭)
인규(麟圭)
고영학(高永學)
병수(炳秀)만규(晩圭)
익규(鷁圭)
신태영(申泰英)
이병배(李炳培)
신재기(申在驥)
강태원(姜太元)
강혁(姜湙)
한근(瀚根)병황(炳璜)하규(夏圭)
민규(旻圭)
병서(炳瑞)세규(世圭)
권영수(權寧洙)
이윤락(李潤洛)
이수연(李需淵)
병현(炳玹)석규(石圭)
병기(炳琦)인규(仁圭)
달규(達圭)
의규(義圭)
순희(順姬)
운희(雲姬)
병용(炳瑢)충균(忠均)
화균(和均)
광균(炚均)
충환(忠煥)
이교준(李敎濬)
권중백(權重伯)
권형하(權瀅夏)
이교직(李敎直)
이병룡(李炳龍)
김인모(金仁模)
이제상(李濟相)
황재기(黃在沂)
성순(性淳)연근(沇根)병제(炳珶)헌규(憲圭)
정규(定圭)
권오훈(權五勳)
안병기(安秉璣)
병용(炳鏞)문규(汶圭)
송순환(宋舜煥)
이종대(李鍾大)
금득수(琴得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