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감(縣監)  삼근(三近)


김삼근(金三近)은 봉례공(奉禮公) 김혁(金革)과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1390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김삼익(金三益)과 김삼우(金三友) 두 동생이 있다.

1419년(세종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함으로서 안동김씨 초유의 생원(生員) 합격자가 되었다. 그리고 비록 고관은 아니지만 조지소 별좌(造紙所 別坐) 함열현감(咸悅縣監) 봉화현감(奉化縣監) 비안현감(比安縣監)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1465년(세조11년) 8월 사망하였다.배위(配位)는 의인(宜人) 상락김씨(上洛金氏)로 삭령감무(朔寧監務) 김전(金腆)의 딸로 생년(生年)은 미상(未詳)이며 1488년(성종19년) 12월에 사망 하였다.

슬하(膝下)에 2남3녀를 두었는데 1남은 한성부 판관(漢城府 判官) 김계권(金係權)이고 2남은 증(贈)이조판서(吏曹判書) 김계행(金係行)이다. 1녀는 어모장군(禦侮將軍) 신시생(申始生)으로 아주인(鵝州人)이고 2녀는 손득노(孫得魯)이며 3녀는 반여생(潘呂生)이다.

묘소(墓所)는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직산동 간좌(艮坐)에 있고 묘표(墓表)는 후손(後孫) 공조참판(工曹參判) 곡운 김수증(金壽增)이 찬(撰)하고 병서(竝書)하였다. 배위(配位) 묘소(墓所)는 부군조(府君兆) 앞 일장지(一丈地)에 있고 묘표(墓表)는 후손(後孫) 이조판서(吏曹判書) 김이양(金履陽)이 찬(撰)하였다.

김삼근이 안동부 풍산현 불정촌(佛頂村)에서 풍산현 소산리(금산촌)로 이주한 시기는 대략 1430년(세종12년) 전후로 짐작된다. 이주와 동시에 제택(第宅:살림집과 정자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건립하여 정착의 토대를 다지는 한편 자질(자식과조카)들의 교육에도 각별한 정성을 보였다.

이런 기반위에서 후세에 수많은 인물을 배출할수 있었다.

공이 기거하던 고택이 비안공구택이며 돈소당이라 한다.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김삼근묘(金三根墓)

예천군(醴泉郡) 호명면(虎嗚面) 직산리(稷山里) 직곡(稷谷)

앞이 의인 강락김씨 묘이며 뒤가 비안공 삼근(三近)의 묘이다. ,

돈소당(敦素堂)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224-3 문화재자료 제211호

돈소당은 비안공(比安公) 김삼근(金三近 1390~1465)이 소산으로 입향하면서 지은 집이라고 한다.

돈소당은 김언행(金彦行)이 그의 호를 따서 당호로 삼았으며 김병학(金炳學)이 현판을 썼으며 비안공구택 현액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이 썼다.

물론 이 집이 처음 세워졌던 때의 원형을 오늘날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 번의 중건을 거치면서 이 집은 원형을 잃어갔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집을 개축한 것은 약 35년 전의 일인데 이때 빈한한 살림살이 탓에 원형을 유지·복원하지 못하고 상당히 축소하여 개축을 하였다고 한다.

기둥도 싸리나무로 되어 있었는데 그렇게 개축하지를 못했고 집이 축대 끝까지 나갔었는데 줄여서 들어앉혔다.
그 때는 아직 문화재 관리가 제대로 안 되던 때라서 나라 보조도 받지 못하고 후손들이 조금씩 성금을 내서 중수를 하였는데 워낙 후손들 살림살이가 풍족하지 못하다 보니 규모를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비안공구택에서 우리가 역사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은 사당뿐이다. 비안공구택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는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사당은 고풍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데 정덕 11년 이라고 쓰인 기와 몇 장이 나란히 처마 끝으로 모습을 내보이고 있다.

정덕은 명나라 무종(武宗)의 연호로 정덕 11년 이라면 1516년(중종 11)에 해당된다.

그러니 이 사당 건물은 오백 년 가까운 연륜을 갖고 있는 것이다.비안공구택의 축대 앞에 서면 평범한 한 채의 허름한 한옥을 볼 수 있다. 그 집이 문화재임을 알려 주는 입간판과 그 집의 대문 좌측으로 나란히 붙어 있는 돈소당이라는 편액 그리고 그 옆의 비안공구택이라는 편액만 없었다면 그 집은 주목받을 만한 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모습을 하고 있다. ,

직산재(稷山齋)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186호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비안공 삼근(三近)과 정헌공 계행(係行)공을 모시는 재사이다.

직산재는 안동김씨와 아주신씨 두 문중에서 함께 한 재사에서 하나의 산에 위치한 조상의 묘소를 수호하고 묘제를 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민속적으로 독특한 사례이다. 16세기 초⋅중엽에 창건된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중수와 이건의 과정이 편액된 현판의 내용을 통해 자세하게 파악되며 강당은 위치에 따른 위계의 표현하기 위하여 원기둥과 네모기둥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고 기둥 위치에 따라 장식적인 익공과 낮은 위계의 민도리 구조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어서 건축계획적인 의도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평면형식 보머리 가공 형식 외기도리의 충량과 고미반자를 위한 직각보의 설치 등에서 조선초 형식이 계승되고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건축적 가치가 있는 점 등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

수편
삼근(三近)
호(號)사은(謝隱)
생(生)1390년 경오(庚午) 월 일
관직(官職)기해(己亥)생원(生員)
선교랑(宣敎郞)
비안(比安)현감(縣監)
 중남(仲男) 계행실기(係行實記)중 봉화현(奉化縣)선생안(先生案)에 부군(
 府君)의 휘(諱)가 기재되어 있고 호(號)는 사은(謝隱)이라 실려있다 舊
 譜에는 부군(府君)이 단지 二남 一녀로 손득로(孫得魯)와 반여생(潘呂生)
  두 사람이 기록되지 않았던것을 이번에 문화류씨(文化柳氏)의 보록(譜錄)
 과 조안음(趙安陰) 종운(從耘)의 씨족원류(氏族源流)에 역시 2인이 있어
 서 2인을 기록한다
졸(卒)1465년 을유(乙酉) 8월 일
묘(墓)예천군(醴泉郡) 호명면(虎嗚面) 직산리(稷山里) 직곡(稷谷)구보(舊譜)에
 는 묘좌라 하였다
 후손(後孫) 참판(叅判) 수증(壽增)이 짓고 썼다
간좌(艮坐) 연분(連墳)
묘표(墓表)가 있다
배(配)의인(宜人)상락김씨(上洛金氏)
생(生)1393년 계유(癸酉) 월 일
졸(卒)1468년 무자(戊子) 12월 일
묘(墓)부군묘앞 한발 앞에 있다
 후손(後孫)판서(判書)이양(履陽)이 경상감사때 개수(改竪)하고 썼다
묘표(墓表)가 있다
 부(父)삭령감무(朔寧監務) 전(腆)
 계행실기에 부가 삭령감무 전이라 실려있다
6 세7 세8 세9 세10 세
근중(斤重)득우(得雨)혁(革)삼근(三近)계권(係權)
계행(係行)
신시생(申始生)
손득노(孫得魯)
반여생(潘呂生)
삼익(三益)원룡(元龍)
정급(鄭伋)
삼우(三友)맹구(孟龜)
중구(仲龜)
숙구(叔龜)
계구(季龜)
권진(權軫)
손인유(孫仁裕)
언적(彦迪)견기(堅器)근(謹)신(信)
지철(之哲)규(揆)신(莘)효영(孝瑛)
효정(孝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