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사간(大司諫)  계행(係行)


김계행(金係行 1431년 2월 6일 ~ 1517년 12월 17일)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취사(取斯) 호는 보백당(寶白堂)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아버지는 비안현감(比安縣監) 김삼근(金三近)이고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상락김씨) 삭영감무(朔寧監務) 김전(金腆)의 딸이다.



김계행은 안동부 풍산현 불정촌(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하리리)에서 2남3녀중 둘째아들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배움에 자질을 보였다. 5세 때부터 글공부를 시작하여 일찍이 아버지로부터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우리 집안을 일으켜 세울 재목이니 학문은 염려할 바가 아니다.]라는 칭찬을 받았다. 10세에 정식으로 배움의 길에 들었는데 이미 글의 뜻에 통달하였고 누구의 독려를 기다리지 않고도 부지런히 송독하였다. 12세 무렵에는 독서를 즐겨 책이 손에서 떠날 날이 없었으며 1444년 14세 되던 해 부친(김삼근)이 비안현감으로 부임하자 함께 따라가 그곳 향교에서 수업을 받기도 하였다.



1447년(세종29년) 17세에 식년시 2등 15위로 진사(進士)가 되고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김종직(金宗直)과 교유하였다. 성주 향학교수(鄕學敎授)시절 조카인 학조대사(學祖大師)가 성주에 들러 중부(仲父=숙부)에게 인사나 올리고 가려고 하였다. 당시 학조대사는 세조때부터 국사(國師)로 있었는데 정희왕후로 부터 각별한 신임을 받고 있었다. 성주수령(星州守領)이 통인(通人)을 시켜 선생을 관아로 불렀으나 가지 아니하고 장조카인 학조가 찾아와 인사를 하게 하였다. 그때 중부(仲父)의 관직을 상부에 청탁하여 승차하도록 하겠다고 하자 공은 크게 노하여 회초리로 다스리며 [내 관직이 승차한들 무슨 얼굴로 세상사람을 대할 것이며 또 다음에 조상을 어떻게 뵈올 것이냐? 본래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타이르고 다시는 대사(大師)를 만나지 않았다. 선생의 심기가 얼마나 올곧은지 짐작할 대목이다.



그 후 충주의 향학교수(鄕學敎授)를 지내고 1480년(성종11년) 식년문과에 병과(丙科)21위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고려되어 정6품직인 종부시 주부(宗簿寺 主簿)에 제수되고 이어서 사헌부감찰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강직한 성격이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아 1482년 52세 되던 해 외직인 고령현감으로 나아갔다.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있으면서 정사를 돌볼 때는 엄숙히 하고 백성을 돌볼 때는 자애로웠다. 항상 청렴과 근신하는 태도를 지키며 매사에 신속하게 업무를 처리해 나갔는데 그 결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교화가 이루어지고 기강이 바로 서 관민 모두가 감히 법을 어기지 못하였다.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홍문관 부수찬(副修撰) 등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삼사(三司)의 요직인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두루 지내며 간쟁업무에 힘썼다.



벼슬길에 있으면서 조정이나 왕실의 병폐에 대해서는 직간을 서슴지 않았고 또 그 일로 여러 차례 사직과 복직을 반복하였다. 김계행의 이런 강직함은 그가 지낸 관직만 일별하더라도 금방 드러나는데 홍문관의 경우 부수찬(副修撰) 부교리(副校理) 교리(校理) 응교(應敎) 전한(典翰) 그리고 부제학(副提學)을 지냈고 사간원(司諫院)에서는 정언(正言) 헌납(獻納) 사간(司諫) 대사간(大司諫)을 차례로 역임하였으며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과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 및 도승지(都承旨) 그리고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등 요직을 두로 섭렵하였다. 1492년 2월 승정원 동부승지 같은해 4월 이조참의 같은해 6월 성균관 대사성과 사간원 대사간 같은해 9월 홍문관 부제학 1495년 5월 승정원 도승지 1496년 사간원 대사간 1498년 7월 사간원 대사간 1499년 1월 첨지중추부사 같은해 8월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의 그리고 종2품인 사헌부 대사헌에 각각 제수되었다.



1498년(연산군4년) 연산군 초기 어지러운 국정을 바로 잡을 것을 몇 번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여 풍산 사제에 있는 집 곁에 서재를 짓고 보백당(寶白堂)이라는 편액을 걸었다. 보백당이라는 이름은 [우리 집에는 아무런 보배가 없으니 오직 청백의 마음가짐만이 보배일 뿐이다.吾家無寶物 寶物唯淸白]라고 한 자신의 시구에서 따온것이다. 김계행은 또 1461년 31세 되던 해에 안동부 길안(吉安) 묵계(현 경상북도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에 별도의 생활 근거를 마련하고 만년의 휴식처로 삼고자 하였는데 특히 1501년 71세 되던 해 송암(松巖)의 폭포 위에 지은 만휴정(晩休亭)은 [만년에 휴식을 취하다.]는 이름 그대로 벼슬에서 완전히 물러난 후 은거하면서 자연을 벗삼던 장소였다.



사림파의 영수인 김종직(金宗直)과 평생에 걸쳐 교유하였는데 이 인연으로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어세겸(魚世謙) 성희증(成希曾) 등 10명과 함께 의금부(義禁府)에 갇혔다가 장형을 치르고 풀려났다. 1506년 76세 되던 해 고향에서 자신이 섬겼던 연산군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종묘사직의 대계(大計)를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임을 잘 알지만 그래도 10여년을 섬겨온 신하로서 어찌 슬프지 않겠느냐며 인간적인 고뇌를 토로하였다.



1517년(중종12년) 12월 17일 세상을 떠나니 천수87세 였다. 1706년(숙종32년) 지방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安東) 길안(吉安) 묵계에 묵계서원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10년)에 이조판서(吏曹判書) 대제학(大提學)에 추증되었고 시호(諡號)는 정헌(定獻)인데 1868년(고종5년) 3월 12일 시호가 문헌(文獻)으로 추증되었다. 문집으로 『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 4권 2책이 있다. 1732년(영조8년) 초간이 이루어졌으며 1901년(광무5년) 중간 되었다.



보백당 김계행선생은 조선 전기 영남 유림에 몇 안되는 중량급 인사였다. 영남 지방의 거장 김종직(金宗直)과 동갑내기로 함께 영남 유림을 이끌며 도덕과 학문으로 사귀었다. 조정으로 나아가서 성종을 보필하며 명관으로 조야에 성망이 높았다. 특히 영의정 인재(仁齋) 성희안(成希顔)과 교분이 두터웠다. 성희안은 숭유정책의 신진사류로서 임금이 많은 자문을 구할 만큼 학문이 깊었으며 1506년 진성대군을 옹립 중종반정의 거사를 성공시킨 1등 공신에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보백당 김계행은 대사간(大司諫)을 지내며 강직하기로 유명하여 성희안(成希顔) 성희증(成希曾) 형제가 경외하는 마음의 친구였다. 한편 김계행은 흔히 장동김씨로 불리는 (新)안동김씨 청음 김상헌의 조부 김생해(金生海)가문의 여명기에 안동김씨의 문호를 연 중흥 시조나 다름없었다. 조선조 전기 안동김씨 초기에 가문을 이끌던 원로급 문장으로 군림하였다. 보백당은 [청백]의 표상이다. 그 기상이 푸르고 성품이 깨끗했으며 푸르기가 청옥 같고 깨끗하기가 백옥을 닮았다. 절개가 얼음과 같이 쨍쨍했다. 서예 유성룡이 [보백당은 강직한 분]이라 칭송했다. 보백당은 아들 다섯을 두었다. 맏이는 참봉 둘째는 진사 세째는 생원 다섯째는 군수로 아버지가 물려준 가보 [청백]을 지키며 사랑했다. 맏딸은 상주 함창(이안) 찰방 박눌(朴訥)에게 시집을 가서 아들 다섯을 낳아 모두 문과에 급제를 시켰다. 맏아들 박거린(朴巨鱗)은 1504년(연산10)에 급제해 금산군수 사헌부장령을 지냈고 둘째 박형린(朴亨鱗)은 1516년(중종11)에 급제해 충주목사 이조참의 셋째 박홍린(朴洪鱗)은 1522년(중종17)에 급제해 도승지 대사헌 예조참판 넷째 박붕린(朴鵬鱗)은 1533년(중종28)에 급제해 한림 세자시강원 설서 다섯째 박종린(朴從鱗)은 1532년(중종27)에 급제해 이조정랑을 지내 5형제(향오린 鄕五鱗) 모두를 나라의 기둥으로 성장시켰다.



향오린(鄕五鱗)중에서 막내아들 박종린의 후손들이 문한으로 예천을 떠들석하게 했다. 문집이나 유고가 있는 선비가 약 40-50명이 나왔다. 의병장 박주대도 여기 출신이다. 둘째딸은 안동 하회 유자온(柳子溫)에게 시집을 갔다. 외증손 입암 유중영을 키워 예조참의 승지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외현손 겸암 유운룡(柳雲龍)과 서애 유성룡(柳成龍)은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경북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피실골에 있으며 묘표(墓表)는 외손 영의정 서애 유성룡(柳成龍)이 기(記)하고 외현손 직장(直長) 박수근(朴守謹)이 썼다. 그 후 비석이 상하고 묻혀 11대손 김이선(金履善)이 쓰고 외후예(外後裔) 이장우(李章瑀)가 다시 써서 세웠다.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만휴정(晩休亭)

보백당 김계행(1431∼1517)이 말년에 독서와 사색을 위해 지은 정자이다.

김계행은 조선 전기의 청렴결백한 관리로 뽑혔던 분으로 ‘내 집에 보물이 있다면 오직 맑고 깨끗함 뿐이다.’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앞면을 마루 형식으로 개방하여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양쪽에는 온돌방을 두어 학문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16세기 초에 지은 이 정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그 아래 떨어지는 폭포는 장관을 이룬다.

정자 아래 바위에는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란 큰 글씨를 새겨 놓았다.

만휴정은 본디 의령남씨 관조의 7세손이며 대제학 양정공 남좌시 공의 손자이시며 김계행의 빙장어른이신 당호가 쌍청헌이신 남상치 공의 정자이다.통정대부행사헌부장령에 벼슬이 이르시고 문장과 도덕이 뛰어나 명성을 떨치시고 임금의 총애가 바야흐로 깊어 출세길이 열리셨으나 계유정난시절 안동와룡으로 낙향하시어 지내시면서 유랑하시던중 거묵역 송암동천후분곡의 경치가 매료되시어 지금 위치에 쌍청헌이란 정자를 지으시고 유유자적 하시다가 졸하시었다.생전 막내딸을 시집보내고 자식이 5남2녀이다 보니(김계행의 재취)쌍청헌 공이 보기가 딱하여 김계행에게 자신의 곁으로 오라고 하여 재산 등을 물려주고 자신의 내외묘사를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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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백당실기(寶白堂實記)

초간본은 1732년(영조 8) 후손 영(泳)과 이재(李栽)에 의해 편집된 것을 1829년(순조 29) 방손 이교(履喬) 등이 간행하였다. 이교의 서문과 권구(權?)·이광정(李光庭) 등의 발문이 있다.
중간본(重刊本)은 1901년 후손 학규(學圭)·원규(元圭)에 의해 목판으로 간행되었는데 조덕린(趙德隣)의 서문과 유도헌(柳道獻)의 발문이 추가되어 있으며 4권 2책으로 되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권수는 세계도(世系圖) 권1은 연보 시 2수 소(疏) 1편 권2는 부록으로 영모록(永慕錄) 권3은 유사(遺事)·행장·묘갈명·봉안문·축문·제문·통문·상량문·중수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

보백당종택(寶白堂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9호 안동시 길안면 묵계리

마을 입구를 들어서면 계명산 남서쪽 끝자락 언덕 위에 보백당 선생의 종택인 안동김씨 묵계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종택은 강 건너 상리(上里)에 있었으나 화재로 전소되고 잠시 고난리(古蘭里)로 우거(寓居)하였다가 1700년대에 현재의 곳으로 옮겼으며 6.25동란으로 일부가 소실되어 전란 후에 현재의 건물로 복원되었다.

묵계종택은 서원에서 멀지 않은 마을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데 정침과 사랑채인 보백당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침은 정면 6칸 측면 6칸의 ㅁ자형으로 돌출 형태를 이루고 있는 사랑채에는 용계당(龍溪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보백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집이다. 두리기둥을 사용하였고 우물마루를 깐 4칸 대청과 2칸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백당이란 현판은 김계행 선생의 자호(自號)로 평소 선생께서 생활철학이 담긴 시귀(詩句) 오가무보물 보물유청백(吾家無寶物 寶物惟淸白) 우리집에는 보물이란 없으니 보물이 있다면 오직 청백 뿐이다 에서 취한 것이라 한다.

가구(架構)는 5량가(五樑架)이며 대청의 왼쪽 측면과 뒷벽에는 판벽에 문얼굴을 내어 미세기 창을 달았다.

그 옆에는 1909년 보백당 선생의 부조전(不祧典)의 칙령(勅令)을 받고 지역 유림과 자손들에 의하여 세워진 불천위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집으로 앞쪽에는 삼문이 있고 낮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묵계종택은 묵계서원과 함께 1980년 지방 민속자료 제19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

정헌공불천위사당(定獻公不遷位祠堂)

묵계 종택내에 있다.
청덕사(淸德祠)라 한다.

보백당과 용계당 사이에는 사당이 모셔져 있으며 대문에는 尊祖(존조) 重宗(중종)이라 쓴 글이 붙여져 있다.

1909년 보백당 선생의 부조전(不祧典)의 칙령(勅令)을 받고 지역 유림과 자손들에 의하여 세워진 불천위 신위를 모시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맞배지붕 집으로 앞쪽에는 삼문이 있고 낮은 담으로 둘러쳐져 있다. ,

직산재(稷山齋)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186호
예천군 호명면 직산리

비안공 삼근(三近)과 정헌공 계행(係行)공을 모시는 재사이다.

직산재는 안동김씨와 아주신씨 두 문중에서 함께 한 재사에서 하나의 산에 위치한 조상의 묘소를 수호하고 묘제를 올리고 있다는 점에서 민속적으로 독특한 사례이다. 16세기 초⋅중엽에 창건된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중수와 이건의 과정이 편액된 현판의 내용을 통해 자세하게 파악되며 강당은 위치에 따른 위계의 표현하기 위하여 원기둥과 네모기둥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고 기둥 위치에 따라 장식적인 익공과 낮은 위계의 민도리 구조를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어서 건축계획적인 의도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평면형식 보머리 가공 형식 외기도리의 충량과 고미반자를 위한 직각보의 설치 등에서 조선초 형식이 계승되고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건축적 가치가 있는 점 등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존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 ,

1063.11.16철종 14년시호(諡號) 정헌(定獻)純行不爽(순행불상) 響忠內德(향충내덕)순수하게 행동하여 어긋남이 없음이 정이요 충성을 다하고 안으로 덕이 있음이 헌이다

1447..세종 29년생원(生員)세종(世宗) 29년(1447)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생원] 2등(二等) 15위(20/100)

1480..성종 11년문과(文科)성종(成宗) 11년(148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1위(31/33)

1490.07.21성종 21년조산대부(朝散大夫)
1490.07.21성종 21년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1493.10.24성종 21년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1498.07.25연산군 4년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
1859.05.27철종 10년증(贈)이조판서(吏曹判書)

안동김씨대종중
수편
계행(係行)
자(字)취사(取斯)
호(號)보백당(寶白堂)
시호(諡號)정헌(定獻)純行不爽(순행불상) 響忠內德(향충내덕)순수하게 행동하여 어긋남
이 없음이 정이요 충성을 다하고 안으로 덕이 있음이 헌이다 .1863
생(生)1431년 신해(辛亥) 2월 6일
관직(官職)정묘(丁卯)생원(生員)
경자(庚子)문과(文科)
역(歷)사인(舍人)
전랑(銓郞)
전한(典翰)
부제학(副提學)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증(贈)이조(吏曹)판서(判書)
증(贈)대제학(大提學)
저서(著書)보백당선생실기(寶白堂先生實記)
 무오사화(戊午士禍)에 三번이나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지만 국문에도 얽히지
 않고 근본을 지켜서 옥사(獄事)에는 다행히도 엮이지 않았다 철종신해一八五
 一년 대신(大臣)들이 주청하여 무오사화를 바로 세움에 이르러서 이조판서(
 吏曹判書)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에 증직(曾職) 되었다안동 묵계서원
 (默溪書院)에 제향하였다
졸(卒)1517년 정축(丁丑) 12월 17일
묘(墓)안동 풍북(豊北) 직곡(稷谷)
 묘갈명은 세마(洗馬) 이광정(李光庭)이 지었다
을좌(乙坐)
배(配)증(贈)정부인(貞夫人)이천서씨(利川徐氏)
졸(卒)1453년 계유(癸酉) 월 일
묘(墓)예천군(醴泉郡) 용궁면(龍宮面) 무이리(武夷里) 와부동(瓦釜洞)
 외현손(外玄孫)영의정(領議政) 류성룡(柳成龍)이 기(記)를 짓고 외현손(
 外玄孫)직장(直長) 박수근(朴守謹)이 썼으나 오래되어 글자가 보이지 않아
  계제앞에 갑신년에 다시 세웠는데 11대손 이선(履善)이 기록하고 외예(
 外裔)진사(進士)이장우(李章瑀)가 썼다
임좌(壬坐)
묘표(墓表)가 있다
 부(父)현감(縣監) 운(運)
 조(祖)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 진(晉)
 증조(曾祖)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효손(孝孫)
배(配)증(贈)정부인(貞夫人)의령남씨(宜寧南氏)
묘(墓)부군조(府君兆)뒷편
묘표(墓表)가 있다
 부(父)지평(持平) 상치(尙致)
 조(祖)호군(護軍) 심(深)
 증조(曾祖)대제학(大提學)의성군(宜城君) 좌시(佐時)
7 세8 세9 세10 세11 세
득우(得雨)혁(革)삼근(三近)계권(係權)학조(學祖)
영전(永銓)
영균(永鈞)
영추(永錘)
영수(永銖)
류유(柳牖)
이장생(李長生)
정훈노(鄭勳老)
한영(韓潁)
김윤리(金允离)
권감(權瑊)
계행(係行)극인(克仁)
극의(克義)
극례(克禮)
극지(克智)
극신(克信)
박눌(朴訥)
유자온(柳子溫)
남한(南漢)
신시생(申始生)
손득노(孫得魯)
반여생(潘呂生)
삼익(三益)원룡(元龍)득수(得壽)
을수(乙壽)
정급(鄭伋)
삼우(三友)맹구(孟龜)용려(用礪)
이려(以礪)
백석산(白石山)
권시언(權時彦)
중구(仲龜)박침(朴沉)
숙구(叔龜)안린(安璘)
계구(季龜)옥린(玉璘)
석린(石璘)
김언보(金彦寶)
권진(權軫)
손인유(孫仁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