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구정(三龜亭)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13호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조선전기 판관공(判官公) 김계권(金係權)의 아들 4형제 김영전(金永銓) 김영균(金永鈞) 김영추(金永錘) 김영수(金永銖)가 노모 예천권씨를 위하여 지은 정자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건물.
1495년(연산군 1)에 건립하였는데 안마당에 거북모양의 돌이 세 개가 있어 삼구정이라 하였으며 어머님이 오래 사시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겼다고 한다.
서측 흙돌담에 둔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동남향하여 본 건물이 있고 그 앞 좌측으로 삼귀석(三龜石)이 있다. 바닥은 우물마루로 깔고 벽체 없이 개방하였다.비교적 큰 잡석으로 기단을 쌓았고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기둥은 원주를 사용하였다.
주상에는 주두(柱頭)를 놓고 앙서로 된 쇠서를 두어 보머리를 받친 초익공계 소로수장집이다. 가구는 5량가로 대량을 전후 평주위에 걸고 이 위에 포대공을 짠후 종량을 놓았으며 종량 위에는 파련대공(波蓮臺工)을 두어 종도리를 받고 있다.
조선 초기에 건립된 정자건축으로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세부구조양식이 다소 변형되었지만 당시의 배치 평면구성 건물규모 등이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는 정자건축이다.
삼구정기(三龜亭記)는 3남 김영균(金永鈞)이 성현(成俔)에게 부탁하여 1496년에 지은것으로 목판으로 삼구정에 걸여있다.
上舍 金世卿氏 以 其鄕 豐山縣 三龜亭之狀。求記於余。謹按豐山爲安東府屬縣。縣西五里許有村。曰金山村。東二十步許有峯。曰東吳。其高僅六七丈。亭跨峯頭。東西南皆距海。厥勢敞豁。眺望無際。
진사 김세경씨가 그의 고향 풍산현에 있는 삼구정의 형상에 대한 기문을 나에게 부탁하였다.삼가 살피어 보건대 풍산은 안동도호부의 속현이다. 풍산현의 서쪽 5리쯤에 촌락이 있는데 금산촌이라고 한다.
동쪽으로 이십 여보쯤의 거리에 봉우리를 동오라고 하는데 그 높이가 겨우 6 7 장이었다.
정자는 봉우리 꼭대기에 걸터앉았고 동 서 남으로 모두가 바다에 이르니 그의 형세가 앞이 탁 틔어 넓어서 바라봄에 끝이 없었다.
청음 김상헌(金尙憲)이 삼구정에 올라 인근 경치를 돌아보며 8곳 아름다운 경관을 정하고 삼구정팔경(三龜亭八景)이라 불렀다. 김상헌의 삼구정 팔경을 받아 계곡(谿谷) 장유(張維)와 상촌(象村) 신흠(申欽)이 삼구정팔영(三龜亭八詠)을 지었다. 이른바 계택상월(谿澤象月) 중 2명의 대문장가가 시를 쓴 것이다.계택상월은 조선 중기 네 사람의 문장가로 장유와 신흠 택당(澤堂) 이식(李植)과)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말한다.
삼구정팔영중 계곡 장유의 앞 4영
학교청봉(鶴嶠晴峯)
왕자는 어느 해에 궐 밖 유람 즐겼던가
복 받은 뜰 옛날 이름 천년토록 전해 오네.
맑은 하늘 부용 색깔 수려한 산봉우리
계수나무 부여잡는 시인의 가을이로다.
마애초벽(馬崖峭壁)
맑은 물굽이 짓누르며 우뚝 솟은 푸른 단애
천길 층층 쌓인 철벽 기어오를 수 없어라.
단풍잎과 들꽃은 색칠한 듯 붙어 있고
물결에 일렁이는 서늘한 그림자 기막히네.
현리연화(縣里煙花)
강물 가에 누워 있는 풍산 옛 고을
난리 뒤 누대도 절로 새로워졌구나.
해마다 흐드러진 꽃 올해도 활짝 피었나니
그 풍광 영락없이 무릉도원 봄빛일세.
역동한송(驛洞寒松)
일백 살 소나무 숲의 새로운 모습
안팎으로 비취색 고르게 깔린 언덕.
그 시절엔 사슴뿔도 거의 막아냈으련만
지금은 모두 변해 늙은 용의 비늘 같네.
상촌 신흠의 뒷 4영
장교관가(長郊觀稼)
너풀너풀 춤을 추는 천 이랑의 벼들이
논두렁에 즐비하게 비단결을 이루었네.
다만 바라노니 좋은 날씨 계속되어
이 즐거움을 영원히 누렸으면.
곡저타어(曲渚打魚)
곡강(曲江) 물가에다 어구를 펼쳐 두니
그물 친 곳엔 물이 어찌나 많은지.
참으로 우스워라 피라미 떼들은
낚싯줄을 입에 물고 꼬리를 흔들어대네.
삼복피서(三伏避暑)
인간세상 삼복이면
대지가 뜨겁기 불과도 같은데
이 정자만은 도대체 어찌하여
시원한 바람이 머리 위로 불어올까.
중추완월(仲秋翫月)
일 년 중의 중추절
중추 이날 밤 달이
마음속 깊은 곳을 깨끗이 맑게 하니
나는 달의 보금자리를 더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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