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조대사(學祖大師)  영형(永衡) |
1.가족관계 학조대사(學祖大師)로 널리 알려진 영형(永衡)은 143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 김계권(金係權)과 제평(齊平) 권맹손(權盟孫)의 딸 예천권씨(醴泉權氏) 사이에서 11남매중 셋째 장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두 누님은 유유(柳牖)와 이장생(李長生)에게 시집갔고 아래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영전(永銓) 진사(進士) 영균(永鈞) 수원부사(水原府使) 영추(永錘)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영수(永銖)등 남동생과 정훈노(鄭勳老) 한영(韓潁) 김윤리(金允离) 권감(權瑊)에게 시집간 여동생이 있었다. 할아버지는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내신 김삼근(金三近)이다. 2.출가 동기 13세때인 1443년 안동 서미리에 있는 중대사(현재는 절터만 있슴)에서 출가하였는데 출가한 연유에 대해서는 몇가지 설이 있다. 첫번째는 집에서 열심히 글을 배우고 있었는데 어느날 풍산 금산촌(소산리) 마을을 지나가던 어떤 노승이 학조의 관상을 보고는 학조의 아버지에게 말했다. 『이 아이를 제게 주시어 절로 보내야 할것 같습니다.』 깜짝놀란 학조의 아버지 계권은 『어찌 그리 말하십니까』 하고 그 까닭을 물으니 노승은 어린 학조를 가리키며 『제 말이 미심쩍으시면 이 아이의 족상(발바닥의 금)을 보십시요. 이대로 속세에 두면 이 아이뿐만 아니라 온 집안이 큰 화를 면치 못할것 입니다.』 하였다. 이에 학조의 아버지가 노승의 말대로 발바닥을 보니 과연 임금왕(王)자가 쓰여 있었다. 그래서 학조의 부모는 13세의 어린 학조를 출가시켜 승려가 되게 하였다고 전한다. 두번째는 학조대사의 외조부이신 제평공 권맹손이 북경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어린 영형(永衡)이 같이 중국에 가겠다고 외조부께 졸랐으나 안된다고 야단을 치신후 중국 사신길에 나서 의주에 당도해 보니 이미 13살 어린아이가 먼저 당도해 있었다. 할수 없이 영형(永衡)을 데리고 중국에 가니 중국 사람이 영형(永衡)의 관상을 보더니 중국 전체를 들어먹을 상이라 하였다. 영형은 원래 턱에 점이 있고 그 점에 긴 수염이 나 있었는데 이런 관상이 중국인을 놀라게 한것으로 보인다. 중국인들이 영형을 죽여 후환을 없애려 하자 영형(永衡)은 도망쳐서 머리를 깍고 동자승처럼 행세하며 압록강을 건너 겨우 살아 돌아왔다. 이길로 안동 중대사로 와서 출가를 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두가지 설중에 첫번째는 판관공께서 1451년 까지 서울에 사셨으므로 1443년 소산 이야기는 년대가 맞지 않고 두번째 설이 맞는것 같다. 1443년에 출가하였는데 1443년 제평공이 북경에 갔고 이 당시는 판관공이나 제평공 두분 모두 서울에 거주하셨기 때문에 가장 타당한 설로 보인다. 3.득도 출가한 영형(永衡)은 현 안양시 소재 삼성산(관악산) 삼막사 등곡대(燈谷臺)에서 득도하였다. 세조때부터 연산군까지 국사(國師)로 지내다 1514년 졸했다. 법명은 학조(學祖) 도호(道號)는 등곡(燈谷) 또는 황악산인(黃岳山人)이다. 단종의 죽음 이후 죄책감을 느끼고 불교에 귀의한 세조를 만났으며 신미(信眉)·학열(學悅) 등과 함께 선종의 승려로서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1459년(세조5년) 신미대사(信眉大師) 학열(學悅)스님과 함께 월인석보(月印釋譜)을 간행하는 등 여러 고승들과 함께 많은 불경을 국어로 번역 간행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지장경언해이며 한글 보급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1464년(세조10년) 속리산 복천사(福泉寺)에서 임금을 모시고 신미·학열 등과 함께 대법회를 열었다. 1467년(세조13년) 세조의 명을 받고 금강산(金剛山)에 보내어 유점사(楡岾寺)를 중건하였다. 1468년에는 신미대사 학열스님과 함께 설법을 하여 양반 사대부들 역시 불교에 귀의하거나 신봉하는 자가 나타났다. 그해 1월 역말(驛騎)을 받고 고성(高城)의 유점사(楡岾寺)로 파송되었으며 그가 데리고 가는 장인(匠人) 15인에게도 또한 왕실에서 역말을 내려 주었다. 4.한글보급에 앞장서다. 1476년 《천수경 千手經》을 언해 교정하였으며 1482년(성종13년) 정현왕후의 명으로 세종 때부터 시작되었다가 중단된 《증도가남명계송(證道歌南明繼頌)》의 명으로 번역 완성하였다.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보급함으로써 창제후 보급되지 않던 한글이 점진적으로 보급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5.대장경 중창과 해인사 중건 1488년(성종19년) 인수대비의 명으로 해인사 중수 및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대장경판당을 중창하였다. 학조스님의 최고 공적은 팔만대장경을 수호한 일등공신이라는 점이다. 이때 해인사 경내에 세조의 원당(願堂)이 설치됨으로써 해인사는 조선왕조가 망할 때까지 왕실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1500년(연산군6년)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의 대장경 3부를 간행 인쇄하고 직접 그 발문을 지었다. 여러 부패와 이권행위 개입 등으로 물의를 빚었으나 갑자사화와 무오사화의 칼을 피해 중종 반정 때까지도 살아 남았다. 해인사 중건시 그 주변의 학전을 몰수하여 불전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해인사 중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함인것으로 보이며 이 사건으로 사림들이 학조대사를 관아에 고발하였는데 그때 현감이 남동생인 영추(永錘)였다. 그 뒤 1520년(중종15년) 왕명으로 다시 해인사 대장경 1부가 간인 되었다. 그가 국역한 불전(佛典)을 살펴 보면 《지장경언해 地藏經諺解》가 초기에 언해된 것으로 추정되며 수양대군에 의하여 완성된 《금강경삼가해언해(金剛經三家解諺解)》를 자성대비(慈聖大妃)의 명에 의하여 교정 인출하였다. 말년에는 스님이 출가한 사찰인 학가산 애련사(艾蓮寺)로 다시 돌아와 입적(入寂)하였다. 6.홍길동과의 인연 가출하여 떠돌던 의적 홍길동(洪吉童)은 김천 황악산 직지사(사명대사가 출가한 절)에서 학조대사를 만나는데 홍길동의 좌절과 억눌린 꿈 그리고 희망을 본 학조대사는 학문과 무예에 남다른 홍길동을 직지사에 머물게 하면서 병법과 무술을 가르쳤다. 황악산인(黃岳山人) 이란 도호는 이때 사용한것으로 보인다. 7.학조대사의 부도 학조대사의 부도는 충청북도 보은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에 스승 신미대사(혜각존자) 부도와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학조의 부도는 신미대사 부도(1480년)를 세우고 34년후 신미대사 부도 옆에 1514년(중종9년) 5월에 건립했다. 탑의 팔각중대석 두면에 [正德九年甲戌五月日立(정덕구년갑술오월일립)]그리고 [學祖燈谷和尙塔(학조등곡화상탑)]이란 5행의 명문이 있어 1514년(중종9년)에 건립 되었음을 알게 한다. 지방문화재 13호로 되어 있던 것을 2004년 4월 5일 보물(보물 제1418호)로 지정되었다 |
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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