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서윤(平壤庶尹)  번(璠) |
김번(金璠 1479년 ~ 1544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字)는 문서(文瑞)이다. 한양(장의동)에 뿌리를 내린 사람으로 직계후손(直系後孫)으로 문과급제자(文科及第者)가 136명에 이르고 대제학(大提學)이 6명 재상(宰相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15명 판서(判書) 40여명 왕비(王妃) 3명 후궁(後宮:영빈김씨) 1명 부마도위(駙馬都尉) 2명을 배출 하였으며 안동김씨 서윤공(번)파의 파조이다. 1513년(중종8년) 35세에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한후 군자감직장(軍資監直長)을 역임하였다. 1515년(중종10년) 성균관전적(典籍)이 되고 이듬해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올랐다. 예조좌랑(禮曹佐郞) 병조좌랑(兵曹佐郞)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 공조정랑(工曹正郞) 안음현감(安陰縣監)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이조정랑(吏曹正郞) 병조정랑(兵曹正郞) 예조정랑(禮曹正郞) 세자시강원문학(世子侍講院文學) 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 춘추관편수관(春秋館編修官) 등을 역임하였다. 1515년(중종10년) 성균관전적으로 있을 때 관북지방에 재난이 발생 가뭄과 메뚜기 피해로 기근이 들어 많은 백성들이 죽어 가는데도 삼남(三南)의 곡식을 조운할 마땅한 사람을 고르지 못할 때 낮은 관직으로 선발되어 흉년을 구제함으로 명성과 경륜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523년(중종18년) 평양부서윤으로 나갔을 때 관서지방에 전염병이 만연하자 둔전책(屯田策)을 건의하고 민식(民食)과 창름(倉廩)을 넉넉히 하며 군졸의 잡다한 세를 없애주어 백성의 주거를 편안하게 하였다. 뒤에 대간으로부터 요승(妖僧) 학조(學祖)의 조카라 하여 탄핵을 받았으나 왕의 신임이 두터워 화를 면하였다. 재물에 대한 탐욕이 지나쳐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많은 기롱(譏弄)을 받았다. 관직은 통훈대부 평양부서윤 겸 춘추관편수관에 이르렀으며 사후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연춘추관성균관의금부사 홍문관대제학 예문관대제학 세자좌빈객에 증직 추서되었다. 묘소(墓所)는 경기도(京畿道) 남양주시(南楊州市) 와부읍(瓦阜邑) 덕소리 석실(石室) 안동김씨분산(安東金氏墳山)에 자좌(子坐) 합폄(合窆)이다. 묘갈명(墓碣銘)은 대사성(大司成) 안분당 이희보(李希輔)가 찬(撰)하고 첨지중추부사 동고 김노(金魯)가 썼으며 그 후 마모되어 후손 공조참판 곡운 김수증(金壽增)이 바꾸어 세웠는데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추식(追識)하고 6대손 성천부사 김창국(金昌國)이 전(篆)하고 묘표(墓表)는 곡운 김수증(金壽增)이 찬(撰)하고 썼다. 다시 세월이 흘러 17대손 백아 김창현(金彰縣)이 번역(飜譯)하고 일중 김충현(金忠顯)이 다시 섰다. 김번의 묘(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 석실 안동김씨분산)는 부인인 남양홍씨(한성부윤 홍심(洪深)의 증손녀이며 판관 홍걸(洪傑)의 딸)의 친정 땅으로 방앗간을 하고 있던 자리였다고 한다. 친정에서 방앗간을 하고 있던 곳을 그의 조부 김계권의 맏아들인 학조대사(學祖大師)가 우연히 이곳을 들렀다가 여기가 천하명당임을 알아차리고 홍씨부인에게 이곳 방앗간 자리에 남편이 죽으면 묘를 쓰도록 권고받았다. 나중에 홍씨부인의 친정에서 이곳이 천하명당임을 알아차리고 급기야 야간에 광중(壙中)에 물을 퍼부어 물이 나니 묘를 쓰면 안된다고 했지만 홍씨부인은 이를 눈치채고 상관없으니 그냥 쓰겠다고 하여 결국 김번을 여기에 안장하였다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