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殉敎者)  건순(建淳)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노론 가문 출신의 천주교 신자이자 순교자였다. 교명은 요사팟이다.

자는 정학(正學) 호는 가귤(嘉橘)이다.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7대손이며 김이구(金履九)의 아들이다.



서울 출신으로 경기도 여주군의 종가로 입양되었으나 1797년 청나라의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만나 그의 지도로 영세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는데 가톨릭에 입교한 일로 일족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때 순교하였고 사형후 파양되었다. 문집으로는 《천당지옥론(天堂地獄論)》이 있다.



청음 김상헌(金尙憲)의 후손인 노론(老論) 가문에서 태어나 9세 때에 이미 도가의 학문을 습득하였으며 또 14세 때에 집안에 있던 《기인십편》(畸人十篇) 《진도자증》(眞道自證) 《교요서론》(敎要序論) 《만물진원》(萬物眞原) 등 천주교 서적을 읽고 《천당 지옥론》을 저술하였으며 이후에는 유학의 경사자집(經史子集)과 불가·도가·병가의 서적을 독파하였다.



그는 경기도 양근(陽根)에 살던 남인출신 학자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 등과도 교류하며 주자가례에 대해 토론하였으며 18세 때 양아버지가 서거하자 주자가례의 상례(喪禮)가 맞지 않는다 하여 따르지 않았고 이를 비판하는 사대부에게는 변호의 글을 써서 내놓았다. 남인 학자 이가환(李家煥)은 그의 천주교 변호문을 읽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학문으로 이름이 있었음은 물론 성품이 점잖고 효성이 두터웠으며 남을 위해 희사도 많이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높은 관직을 차지하게 될 것으로 믿었다.



그는 권철신 이가환 등과 교유 토론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자세히 이해하게 되었고 1797년 음력 8월경 청나라 출신의 신부 주문모(周文謨) 신부를 만나 면담한 뒤 천주교에 입교할 신념을 확신하게 되었다. 처음 그는 이중배(李中培 마르티노) 등과 교분을 쌓고 청나라 북경의 선교사를 만나본 후 그들로부터 천주교교리에 대한 지식을 학습 조선에 들여와 널리 전파할 계획을 세운 적도 있었고 주문모 신부를 만나서는 그를 통해 서양의 군사지식과 군함 제조술을 배웠으며 이를 바탕으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으려 한다는 계획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신부를 만난 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이중배 이희영(李喜英 루가) 원경도(元景道 요한) 등에게 천주교를 전하였다. 그러다가 그해 11월에 소북(小北) 출신의 강이천이 해도병마설(海島兵馬說)을 퍼뜨린 죄로 유언비어 날조혐의로 체포 압송되면서 당파를 초월하여 가까이 지냈던 김건순도 연루되어 함께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당하였다. 그러나 정조의 특별 은혜를 입어 곧 석방될 수 있었다.



주문모 신부의 지도를 받아 영세를 받고(1799년 7월 8일 (음력 6월 6일) 신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후에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따라 전교에 앞장섰고 정약종(丁若種 아우구스티노)과 함께 교리를 체계적이면서도 쉽게 설명한 《성교전서》(聖敎全書)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작업은 박해로 중단되고 말았다. 가톨릭에 입교한 일로 일족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때 그의 생부와 형은 그가 천주교 믿는 일을 중단 배교시키려고 온갖 설득과 위협과 회유를 다하였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1800년에 즉위한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정순왕후가 천주교 엄금에 관해 하교를 내리자(1801년 2월 22일(음력 1월 10일)) 주문모 신부가 자수(4월 24일(음력 3월 12일))한 직후에 체포되어(4월 28일(음력 3월 16일))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형문에서 천주교 신자가 아님을 내세우려 하였고 주문모 신부와의 대질에서도 처음에는 그를 본 일이 없다고 주장하였으며 영세 사실까지도 부인하였으나 그는 6월 1일(음력 4월 20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당하였다.(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황사영(黃嗣永)은 그 뒤 〈황사영 백서〉에서 그를 순교자라 하였고 클로드샤를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도 그를 순교자로 설명하고 있다.



그가 처형당할 때 시민들에게 세상의 벼슬이나 명예는 모두가 헛되고 거짓된 것이오. 나 역시 약간의 명망이 있고 벼슬도 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헛되고 거짓된 것이기에 버리고 취하지 않았소. 오직 하느님의 성교만이 지극히 진실한 것이기에 이것을 위해 죽음도 사양치 않는 것이오. 당신들도 이 뜻을 자세히 알도록 하시오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참수 당해 순교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26세였는데 장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했습니다 (황사영 백서)



사형 집행 후 집안에서 파양(罷養)하였다.고종 정미년에 신원(伸寃)되었다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1801.03.16신유사옥
추국 죄인 주문모(周文謨)가 언어가 익숙하지 못하므로 글을 써서 고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이 몸은 대대로 소주(蘇州) 땅에서 살다가 장년(壯年)이 되어 북경(北京)의 천주당(天主堂)에 와서 머물러 살았습니다. 갑인년(1794) 봄에 조선인(朝鮮人) 지황(池璜)을 만나 동지사(冬至使)의 행차 때에 변문(邊門)이 통하였으므로 비로소 책문(柵門)을 나오게 되었는데 이는 서양인 양동재(梁棟材)가 소개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권성(權姓)·최성(崔姓)의 사람과 서로 서찰을 통하였는데 처음에 상봉했던 지황은 을묘년(1795)에 포청(捕廳)에서 죽었습니다. 저는 의주(義州)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학습하기를 원하는 여러 사람들의 집을 옮아가며 머물러 거주하였습니다." 라고 공술하였다. 그런데 그 말에 연루된 여러 사람들이 대개 국옥 가운데 감죄(勘罪)받은 자가 많이 있었다. 또 섬에 천극한 죄인 이인(李䄄)의 처 송씨(宋氏)와 인의 아들 이담(李湛)의 처 신씨(申氏)에 이르러서는 영세(領洗)까지 받았는데 영세란 곧 사학에서 교육받는 법이었다. 국청에 참여했던 시임 대신·원임 대신 및 금오 당상(金吾堂上)이 서로 거느리고 구대(求對)한 다음 인의 처와 담의 처에게 사사(賜死)하기를 청하자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선조(先祖)께서는 이 죄인들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한 은혜를 베푸셨는데 그 권속(眷屬)들이 이번에 부범(負犯)한 것에 이르러서는 크게 풍화(風化)에 관계되니 단지 그 죄를 죄주어 다른 사람들을 징계함이 마땅하다. 그 집안이 이미 국가의 의친(懿親)에 관계되지만 먼저 이 무리로부터 법을 적용한 후에야 여항(閭巷)의 필서(匹庶)들이 방헌(邦憲)이 있음을 알고 징계되어 두려워하는 바가 있을 것이니 경들이 청한 것을 윤종(允從)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전지(傳旨)하기를 "강화부(江華府)에 안치(安置)한 죄인 인의 처 송성(宋姓) 등은 고부(姑婦)가 모두 사학에 빠져서 외인(外人)의 흉추(凶醜)와 왕래하여 서로 만났으며 방금(邦禁)이 엄중함을 두려워함이 없이 방자하게 그 집안에 숨겨 주었으니 그 부범(負犯)한 죄를 논하면 하루도 천지 사이에 용납할 수가 없다. 이에 아울러 사사(賜死)한다. 또 주문모의 공사(供辭) 가운데 김건순(金建淳)·강이천(姜彛天)·김여(金鑢)·김이백(金履白) 등 여러 사람들은 서로 모여서 전법(傳法)했다는 말이 있었으니 아울러 발포(發捕)하도록 하라." 하였다.
1801.03.27순조 1년신유사옥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옥사(獄事)가 지금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가?" 하였는데 영부사 이병모(李秉模)가 말하기를 "이번에 다스린 옥사는 두 가지 단락(段落)이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사학(邪學)의 당류(黨類)에 대한 것이었고 끝에 가서는 요언(妖言)을 한 무리에 대한 것이었는데 주문모(周文謨)의 국초가 나온 후 처음부터 끝까지의 옥정(獄情)이 혼합되어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정사년(1797) 의 강이천(姜彝天)·김여(金鑢)의 무리에 대한 옥안(獄案)이 반드시 추조(秋曹)에 있을 것인데 이것을 가져다 보면 반드시 근거할 만한 일이 있을 것이다. 경들은 과연 낱낱이 보았는가?" 하였는데 영의정 심환지(沈煥之)가 말하기를 "정사년에 선대왕(先大王)께서 특별히 너그럽게 용서하시는 뜻으로 번거롭게 반문(盤問)하지 않은 채 곧 발배(發配)하게 하셨으므로 그 당시의 문안은 매우 간략하여 고증할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강이천은 김건순(金建淳)이 지벌(地閥)과 재화(才華)가 월등하고 여주(驪州)에 살면서 산업(産業)이 풍족한 까닭에 그와 교유하기를 원하여 세 차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당시에는 글을 논하는 데 지나지 않았습니다. 김이백(金履白) 또한 재주를 지닌 사람으로서 항상 김건순의 집에 머물다가 그의 사령(使令)이 되어 강이천과 김여의 사이에 왕래했었습니다. 그러므로 김이백 또한 강이천·김건순의 모임에 참여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이때가 어떠한 시기인가? 천재(天災)와 시변(時變)이 겹쳐서 발생하고 있다. 편안한 때를 당해서도 위태함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한만(汗漫)하게 모여 이야기나 하고 있을 것인가?……’ 하였습니다. 그 후 강이천이 천안(天安)의 전장(田庄)에 가서 머물고 있었는데 김이백의 처가가 그 근처에 있었으므로 자연히 서로 왕래하게 됨에 따라 교계(交契)가 더욱 긴밀해져서 못하는 말이 없었습니다. 김신국(金信國)이라는 자는 향리(鄕里)에 살면서 산업을 다스려 부유하다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데 흉언 패설(凶言悖說)을 강이천에게 들었습니다. 이는 대개 강이천이 뜬 소문을 펴뜨려 그를 공갈해서 동요시킴으로써 그 재산을 흩고 곡식을 나누어 주기를 도모하였으니 강이천이 계획적으로 간사한 꾀를 부린 것은 오로지 이에 있었던 것입니다. 김신국이 강이천의 흉패한 말을 그 종형(從兄)인 전 첨지 김정국(金鼎國)에게 전하자 김정국이 경해(驚駭)함을 금하지 못하여 친한 재신(宰臣) 김달순(金達淳)을 방문하여 일의 실상을 죄다 진술하여 그로 하여금 이를 위에 아뢰게 하니 김달순이 밀서(密書)를 봉하여 올렸습니다. 선조(先朝)께서는 가혹하게 적발하지 않고자 힘써 평윤(平允)한 데에 돌려서 강이천·김건순의 무리를 형조(刑曹)에 회부하여 대략 원배(遠配)의 율(律)만을 시행하게 하셨습니다. 대저 강이천과 김건순이 범한 죄는 조금 같지 않은 점이 있었지만 헛소문을 전파하여 소란을 피운 것은 강이천의 사죄(死罪)이며 두루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사학에 물들게 한 것은 김건순의 사죄에 해당됩니다. 더구나 김건순은 곧 고 상신(相臣) 김상헌(金尙憲)의 봉사손(奉祀孫)이고 또 의리를 굳게 지키고 경술(經術)을 지닌 김양행(金亮行)은 그의 생가(生家)의 조부(祖父)가 되니 선조(先朝)께서 특별히 관대한 법을 좇아 내버려 두고 묻지 말라고 하신 것도 대개 이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는데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김건순이 비록 명조(名祖)의 후손이라고 하나 그의 죄범(罪犯)이 이와 같다면 또한 장차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가 이러한 처지로 이러한 죄범(罪犯)을 끼쳤으니 더욱 통분스러운 일이며 더욱 죽일 만한 일이다. 그리고 주문모에 대해서 경들을 장차 어떻게 처분하려 하는가?" 하자 이병모가 말하기를 "그 근각(根脚)(죄를 범한 사람의 고향 생년 월일과 용모 및 그 조상을 적은 서류) 을 받아 그 문적(文跡)을 남겨 두어 훗날의 근심을 끼칠 필요가 없으니 곧바로 군법을 시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고 심환지는 말하기를 "그가 이미 우리 나라에서 머리를 기르고 또 언어와 의관도 다른 자취가 없으니 그 근본이 어느 곳의 사람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물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그 흉악하고 모진 짓을 행한 것으로써 속히 군문(軍門)으로 하여금 일률(一律)로 처단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으며 좌의정 이시수(李時秀)는 말하기를 "그가 이미 범월(犯越)한 지 오래 되었고 무릇 여러 사당(邪黨)들이 아비처럼 섬긴 까닭에 우리 나라의 국사(國事)와 민속(民俗)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이 없습니다. 지금 만약 이자(移咨)하여 입송(入送)한다면 예측하지 못할 근심이 도리어 입송하지 않은 것보다 더하여 갈등을 초래할 염려가 있을 것입니다." 하고 우의정 서용보(徐龍輔)는 말하기를 "비록 법률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종적이 궤비(詭秘)해서 도적과 다름이 없으니 이제 도적을 다스리는 율로 군문(軍門)에서 거행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군법을 쓴다면 함부로 죽였다는 혐의가 없겠는가? 또 그가 피국(彼國)의 사람이라는 실상이 옥안(獄案)에 밝게 실려 있어서 온 나라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데 이렇게 한다면 후환이 없겠는가?" 하자 이병모가 말하기를 "김건순이 주가(周哥)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장차 거함(巨艦)을 건조하고 갑병(甲兵)을 양성해서 대해(大海) 가운데 도성(都城)이나 마을을 이룰 수 있을 곳에 들어가 곧바로 피국을 공격해서 옛날의 수치를 씻겠다.……’ 하였는데 옛날의 수치란 것은 곧 병자년(1636) 의 일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주가가 답하기를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나에게 전수할 만한 정술(正術)이 있으니 우선 너의 경영하는 것을 버리고 나의 학(學)을 따르는 것이 옳다.……’ 하였습니다. 이렇게 수작(酬酌)한 것이 이미 주가의 초사(招辭)에서 나왔는데 이제 만약 이자(移咨)한다면 피국(彼國)의 지나가는 곳의 각 아문(衙門)에서 장차 반드시 그 곡절을 반힐(盤詰)할 것이고 만약 갑병을 양성해서 피국을 공격하겠다는 등의 말이 나온다면 혹시라도 피국에게 트집 잡힐까 두려우니 그 염려스러움을 어찌 이루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설사 피국에서 반드시 알 리가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 나라에서 먼 훗날을 염려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극진한 도리를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범월(犯越)한 죄인의 소행이 망측하여 화변(禍變)이 조석(朝夕)에 임박해 있으므로 부대시참(不待時斬)할 뜻으로 한편으로는 이자(移咨)하고 한편으로는 법을 적용하는 것이 어떠할지 모르겠다. 그렇지 않으면 한가지 방도가 있다. 죄인이 부범(負犯)한 죄는 용서할 수가 없고 장차 예측하지 못할 근심이 있기 때문에 급급하게 주멸(誅滅)했다 하고 혹은 주멸당한 사람이 대국(大國)으로부터 왔다고 하면 ‘과연 그러한가?’라는 뜻으로 주문(奏文)에 올리는 것도 또한 정성을 다하는 도리에 해롭지 않을 것이다. 소국(小國)에서 대국의 사람을 함부로 죽이는 것은 도리로 헤아려 보더라도 매우 불가한 일이다. 오늘날의 계책은 여러 가지로 상량(商量)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으니 모름지기 만분의 일이라도 근심을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였는데 심환지가 말하기를 "도둑을 다스리는 율(律)에 의거하여 군법을 시행하는 것이 한 방책이고 그가 피인(彼人)인지 자세히 알지 못하고 범한 죄가 극도로 무겁기 때문에 부대시참(不待時斬)으로 처단하였다는 뜻으로 이자하여 보고하는 것도 또한 한 방책입니다. 이 두 가지 방책에 대해서는 신 등이 연석(筵席)에서 물러가 다시 난만(爛漫)하게 상의한 후에 우러러 주달(奏達)하겠습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주가(周哥)는 결단코 입송(入送)시킬 수 없다. 우선 여러 죄수들의 공초(供招)가 끝난 후에 처단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병모 등이 말하기를 "일전에 자교(慈敎)로 사학 죄인(邪學罪人)들은 각 고을의 옥중에 흩어 정배(定配)한 다음 한 장소를 따로 설치하여 구류(拘留)하는 일에 대해 신 등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아뢰게 하셨는데 삼가 자교에 의거하여 사학 죄인들을 경중(輕重)을 나누어 각 고을에 산배(散配)하기로 정하였으나 죄의 대소(大小)를 물론하고 일체 옥중의 다른 곳에 구류하는 것은 법의(法意)가 아닌 듯합니다. 일체 각 고을의 수령들에게 맡겨 그들로 하여금 읍리(邑里)에 보수(保授)하게 하되 그 방수(防守)를 엄중하게 하고 그 행사(行事)를 자세히 살펴서 점차 오염되는 폐단이 없게 하는 것이 좋은 듯합니다." 하니 대왕 대비가 하교하기를 "무릇 비상한 일이 있으면 또한 비상한 거조가 있는 법이다. 이번의 사옥(邪獄)은 곧 전고(前古)에 없었던 일이므로 이를 처분함에 있어 법례(法例)의 있고 없는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는데 따로 한 옥(獄)을 설치하는 것이 과연 십분 온당하지 못하다면 다시 더 상의(商議)하여 형정(刑政)에 적당하도록 힘써 따르는 것이 옳다." 하였다. 이병모가 말하기를 "다스리는 도리는 마땅한 인재를 기용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기용할 만한 인재가 음로(蔭路)에 막혀 있지만 특이한 간국(幹局)을 선발하여 좌이(佐貳)·방악(方岳)(감사의 직책. 요(堯)임금 시대에 사악(四岳)이 국정을 다스렸는데 사악은 사방(四方)의 악(岳)이므로 이를 방악이라 칭하였음) 에 두루 시험해 보면 인재를 기용하는 정사에 보탬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전 목사(牧使) 임육(任焴) 목사 윤문동(尹文東)·이소(李素) 전 군수 신대우(申大羽)는 모두 발탁해서 임용하기에 적합한 사람들이니 청컨대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분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여러 대신들에게 순문하니 모두 의논하기를 "대계(臺啓) 가운데 고 판서 정창순(鄭昌順) 고 첨지 유협기(柳協基)의 관작을 추탈하는 일에 대해 마땅히 대신들에게 하문하여 처분하겠다는 하교가 있었습니다. 대계에서 논한 것은 대개 악을 징계하는 뜻에서 나왔으나 그 사람이 죽은 후에 극률(極律)을 갑자기 시행하는 것은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추탈은 곧 극률인데 어떻게 가볍게 죽은 사람에게 가할 수 있겠는가? 대계는 속히 정지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심환지가 말하기를 "고 참의 이택징(李澤徵) 고 정언 이유백(李有白)은 이미 특별히 은전을 입어 신원되고 복관(復官)되었습니다. 그 당시 고 부사(府使) 임관주(任觀周)가 이택징을 찾아가 만나 보고 명소(名疏)라고 창찬한 까닭에 대계로 인하여 원배(遠配)되었었습니다. 고 승지 이유철(李有喆)은 이유백의 형이 되는 까닭에 체포되었다가 미처 국문하지 아니하여 특교(特敎)로 인해 도배(島配)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 모두 사전(赦典)을 입었으나 직첩(職牒)을 아직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이택징·이유백에 대한 일은 이제 이미 소설(昭雪)되었으니 임관주·이유철도 또한 마땅히 일례로 복관(復官)시키는 은전을 시행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1801.03.27순조 1년신유사옥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계후 사손(繼後祀孫) 김건순(金建淳)을 파양(罷養)하였는데 사학 죄인이었기 때문이었다.
1801.04.20순조 1년신유사옥
죄인 김건순(金建淳)은 본래 명벌 현족(名閥顯族)으로서 대대로 부요한 재물을 물려받았다. 연소할 때부터 총명하였으나 힘써 널리 기이한 것을 숭상하여 경박하고 탄망(誕妄)한 문객(門客)들을 집안에서 먹여 살렸으며 정도에 어긋난 방술(方術)에 관한 책을 보기를 좋아하였다. 이희영(李喜英)·정광수(鄭光受)·홍익만(洪翼萬) 등의 무리는 스스로 양학(洋學)을 익힌 자들이었는데 김건순이 그들에게 소개받아 주문모(周文謨)를 찾아가서 만나보고는 이인(異人)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마음을 기울여 교유하며 수작하는 즈음에 ‘도성(都城)이나 마을을 세울 수 있는 해도(海島)를 하나 얻어서 군기(軍器)를 수선하고 거함(巨艦)을 만들어 군사를 이끌고 중국에 쳐들어가서 병자년(1636) ·정축년(1637) 에 받은 옛날의 수치를 씻고자 한다.’ 하니 주문모가 ‘크게 옳지 못하다.’ 하였다. 그리고 서양의 야소학(耶蘇學)을 가지고 고하니 김건순이 기뻐하여 세 차례 가서 회동하기에 이르러 점차 빠져들어 오염되는 것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이것은 주문모의 초사(招辭)에 나온 것이었고 여러 사람들이 또한 증명하는 것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굳게 숨기다가 마침내 찾아가서 만난 정상을 자복하게 되었다. 그래서 요서(妖書)·요언(妖言)을 전하여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킨 것으로 결안(結案)하여 정법(正法)하였다. 죄인 김이백(金履白)은 김건순의 서족(庶族)으로서 허황되고 무뢰한 자인데 김건순의 집에서 기식(寄食)하며 강이천(姜彛天)·김여(金鑢)·김선(金䥧) 등과 교결(交結)하고 매양 문주(文洒)(시문을 짓고 술을 마심) 의 모임에 참여하여 서론(緖論)을 들었으며 김건순과 강이천의 사이에 왕래하여 말을 전하며 보태고는 어지럽힐 것을 생각하여 요언을 선동하여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품(品) 자 모양을 닮은 섬이 있는데 병마(兵馬)가 강장(强壯)하다.’ 하고 또 말하기를 ‘바다 가운데 진인(眞人)이 있는데 육임(六壬)(골패 등을 가지고 점치는 방법 중의 하나. 둔갑(遁甲)·태을(太乙)과 합쳐서 삼식(三式)이라 함) 과 둔갑(遁甲)의 술책을 알고 있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허황된 근거 없는 말들이었다. 강이천과 서로 배짱이 맞아서 요언을 전파하여 어지럽히며 많은 사람들을 현혹시켰다는 것으로 결안(結案)하여 정법(正法)하였다. 죄인 강이천은 원래 경솔하고 천박한 자로서 문예에 민첩하였으나 식견이 전혀 없었는데 김이백과 더불어 요언(妖言)을 지어내어 소란을 피웠으며 해도(海島)에 강장한 병마(兵馬)가 있다는 등의 말을 김신국(金信國)에게 말하여 위협하여 재물을 속여서 빼앗을 계책을 삼았다. 그런데 기미년(1799) 에 김신국의 종형 김정국(金鼎國)의 고변으로 인하여 추조(秋曹)에서 형신(刑訊)하여 사실을 구핵한 다음 참작하여 정배되기에 이르렀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여러 죄인들의 초사에 거듭 나왔으므로 나래(拿來)하여 엄중히 추국하게 하였다. 사교(邪敎)를 학습한 것은 철저하게 은휘(隱諱)하였으나 평소 말을 수작함에 있어 반드시 별호(別號)를 불렀으니 주문모는 ‘남곽 선생(南郭先生)’이라고 하였고 김건순은 ‘가귤(嘉橘)’이라고 하였으며 그 자신은 ‘중암(重菴)’이라고 하였다. 허다하게 주무한 자취가 여러 초사에서 죄다 드러났는데 미처 결안(結案)하기 전에 옥중(獄中)에서 경폐하였다. 죄인 주문모는 자칭 소주인(蘇州人)으로서 서양학을 나라 안에 포교하기 위해 몰래 국경을 넘어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7 8년 동안 종적을 숨겼는데 우부 우부(愚夫愚婦)들이 모두 그에게 현혹되어 점차 그릇되게 물들어 그를 신부(神父)·교주(敎主)로 존숭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 근심이 장차 모두 금수(禽獸)의 지역에 빠져들기에 이르렀으므로 방금(邦禁)을 지극히 엄중하게 하여 사방에서 은밀한 가운데 살펴 체포하게 되자 용신(容身)할 곳이 없어서 왕부(王府)에 자수하였으니 만에 하나라도 요행히 죽음을 면할 수 있기를 바라는 계책이었다. 그가 스스로 말하기를 ‘언어가 미숙하니 공사(供辭)를 글로 써서 바치겠다.’ 하였는데 대개 보잘것없는 추악한 무리의 그 행동 거지를 구명해 보면 곧 간악한 여투(餘套)인 것이다. 그래서 국법(國法)으로 헤아려 볼 때 군율(軍律)을 시행하는 것이 합당하므로 군문(軍門)에 출부(出付)하여 효수(梟首)해서 많은 사람들은 경계하게 하였다. 죄인 강이문(姜彝文)은 강이천의 아우인데 공초하기를 ‘제 형이 김건순 김여의 형제 및 김이백 등 여러 사람들과 서로 만났을 때 저를 우매하다 하여 형이 문득 집안에 들어가 있으라고 한 까닭에 주고받는 말을 일찍이 참여하여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김건순이 사학을 칭찬하여 말한다는 것은 형에게 들었습니다.’ 하였으므로 참작해서 언양현(彦陽縣)에 정배(定配)하였다. 죄인 김정신(金廷臣)은 강이천과 친밀하였으므로 강이천의 지시를 받아 김이백과 함께 여주(驪州)의 김건순 집에 서찰을 전하면서 천당(天堂)은 지극히 즐거운 곳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였으므로 참작해서 북청부(北靑府)에 정배하였다. 죄인 김여·김선 형제는 일찍이 김건순·강이천과 가장 친밀하여 문장으로 서로 허여(許與)하였는데 전후로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시문(詩文)을 짓고 술을 마시기를 즐겨하였으니 서로 하지 않은 말이 없었다. 단지 주문모를 찾아갔을 때 참여하지 않은 까닭에 사학에 물든 일에 대해서는 한결같은 말로 발명(發明)하였으므로 감사(減死)하는 율(律)을 시행하여 김여는 진해현(鎭海縣)에 정배하고 김선은 초산부(楚山府)에 정배하였다. 죄인 김종억(金宗億)은 천안(天安)의 풍서(豐西)에 있는 강이천을 찾아가 만나 보았고 강이천과 김건순 사이에 서찰이 왕복한 실상을 알았는데 강이천이 그에게 영남(嶺南)에서 인재를 구득(求得)할 것을 권하고 또한 그에게 남곽 선생을 만나 보도록 권하였다고 하였으므로 감사의 율을 시행하여 영원군(寧遠郡)에 정배하였다. 인하여 추국을 철폐하도록 명하였다.
1908.03.21순종 1년신유사옥
김건순등 39명의 죄명을 벗겨주다

안동김씨대종중
문정공(상헌)파
건순(建淳)
자(字)정학(正學)
호(號)가귤(嘉橘)
생(生)1776년 병신(丙申) 12월 9일
저서(著書)천당지옥론(天堂地獄論)
 겨우 약관(弱冠)에 문장으로 아름이 자자하였다.一七九七년 청나라의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만나 그의 지도로 영세를 받고 천주교에 입교하였는데 가
 톨릭에 입교한 일로 일족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一八○一년 신유박해(辛酉
 迫害) 때 순교하였고 사형후 파양되었다. 고종정미년에 신원(伸寃)되었다
배(配)기계유씨(杞溪兪氏)
생(生)1779년 기해(己亥) 월 일
졸(卒)1846년 병오(丙午) 1월 1일
묘(墓)여주시(驪州市) 여흥동(驪興洞) --여주군 주내면 신대리
오좌(午坐) 합폄(合窆)
 부(父)부사(府使) 한재(漢宰)
 외조(外祖)김종후(金鍾厚) 본(本) 청풍(淸風)
19 세20 세21 세22 세23 세
신겸(信謙)양행(亮行)이구(履九)직순(直淳)인근(仁根)
정근(貞根)
유정주(兪正柱)
이흥연(李興淵)
건순(建淳)윤근(潤根)
익근(謚根)
청순(淸淳)우근(友根)
헌근(獻根)
호근(灝根)
유범주(兪範柱)
민이현(閔彛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