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조참판(刑曹叅判) 양행(亮行) |
자는 자정(子靜). 호는 지암(止菴) 또는 여호(驪湖). 서울 정동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참판에 추증된 김신겸(金信謙)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좌의정 이이명(李頤命)의 딸이다. 민우수(閔愚洙)의 문인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자량(慈良)하며 학문에 대한 조예(造詣)가 정밀하고 심오하였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학문연구에 전념하여 성리학을 비롯해 예학과 역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이간(李柬)의 인물동성론(人物同性論)에 동조한 김창흡(金昌翕)의 영향을 받아 낙론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했다. 1754년(영조 30)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 이듬 해 부수(副率)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1758년에는 학행으로 천거되어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시강원자의(侍講院諮議)·사옹원주부·사헌부지평·장령·집의·성균관사업(成均館司業)·호조참의·예조참의·경연관·공조참의에 임용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했다. 그 뒤 직제학을 거쳐 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779년 공조참판(工曹叅判) 형조참판(刑曹叅判)에 올랐다. 이우신(李友信)·민치복(閔致福)·박준원(朴準源) 등의 많은 학자들이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지암문집(止菴文集)』 9권이 있다. |
지암집(止菴集)조선후기 문신·학자 김양행의 시·소차·계의·서(書) 등을 수록한 시문집. |
1755.01.09 | 영조 31년 | 부수(副率) |
1759.12.28 | 영조 35년 | 자의(諮議) |
1760.10.24 | 영조 36년 | 사옹주부(司饔主簿) |
1761.01.04 | 영조 37년 | 지평(持平) |
1762.05.02 | 영조 38년 | 장령(掌令) |
1762.09.15 | 영조 38년 | 집의(執義) |
1777.04.05 | 정조 1년 | 호조참의(戶曹參議) |
1777.10.17 | 정조 1년 | 예조참의(禮曹參議) |
1778.12.24 | 정조 2년 | 공조참의(工曹參議) |
1779.02.12 | 정조 3년 | 동부승지(同副承旨) |
1779.03.04 | 정조 3년 | 이조참의(吏曹參議) |
1779.04.04 | 정조 3년 | 돈녕도정(敦寧都正) |
1779.09.09 | 정조 3년 | 공조참의(工曹參議) |
1779.10.09 | 정조 3년 | 형조참판(刑曹參判) |
1779.11.23 | 정조 3년 | 졸기(卒記) 형조 참판 김양행(金亮行)이 졸(卒)하였다. 김양행의 자(字)는 자정(子靜)이고 호(號)는 지암(止庵)이며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증손이다. 젊어서부터 경학(經學)에 힘쓰고 행실을 깨끗이 하였으며 고(故) 대사헌(大司憲) 민우수(閔遇洙)에게 수업하였다. 영종(英宗)무인년420) 에 학문에 독실하고 실천을 힘쓰는 것으로 천거되어 대직(臺職)에 제수하였으나 응소(應召)하지 않았다. 찬선(贊善) 송명흠(宋明欽)이 엄한 견책을 받았을 때에 상소하여 경계를 아뢰었는데 영종이 노하여 면직하여 서인(庶人)이 되었다. 금상이 즉위하여 여러 번 불렀으나 병을 이유로 나오지 않았다. 기해년에 임금이 영릉(寧陵)에 전알(展謁)하였을 때에 김양행이 여주(驪州)에 살았으므로 명을 받고 행전(行殿)에 들어와 뵙고 거가(車駕)가 돌아올 때에 따라서 조정에 나왔다가 곧 돌아갔다. 이때 홍국영(洪國榮)이 권세를 부리고 날뛰었으므로 금문(禁門)을 들어가는 자는 다 문안하였으나 김양행만은 돌아보지 않았는데 임금이 늘 말하기를 ‘풍의(風儀)가 청고(淸高)한 것이 볼만하니 근세의 유자(儒者) 중에서 으뜸이라 하겠다.’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졸하니 하교하기를 ‘이미 초연(初筵) 때부터 노쇠하고 병든 줄 알기는 하였으나 문득 졸서하였다는 기별을 들을 줄은 생각하지 못했으니 내가 애통하고 상심된다. 졸서를 슬퍼하고 돌보는 은전(恩典)은 상례(常例)와 같이 할 수 없다.’ 하고 상례의 치부(致賻) 이외에 고(故) 찬성 박필주(朴弼周)·고 집의 송능상(宋能相)에 견주어 재량하여 더 주라고 명하였다. |
1805.01.07 | 순조 5년 | 증(贈)이조판서(吏曹判書) |
1805.01.07 | 순조 5년 | 시호(諡號) 문간(文簡) 道德博聞(도덕박문) 一德不懈(일덕불사)도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이 많음이 문이요 순일한 덕으로 느슨함이 없음이 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