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조판서(禮曹判書)  김이도(金履度) |
![]() 1800년(정조 24) 전령(前令)으로서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바로 부수찬(副修撰)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정언(正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그 해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뒤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고 벽파(僻派)가 득세하자 시파(時派)로 몰려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804년 대사성(大司成)을 비롯하여 이듬해 대사간(大司諫)이 되었으며 우주서사관(虞主書寫官)으로 가자되었다. 1806년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경기도관찰사·예조판서·형조판서·한성부판윤 1810년 병조판서·공조판서 등을 거쳐 좌참찬을 역임하였다. 또 그 해 대사헌으로 액례군(掖隷軍) 증액을 상소하고 무예별기군을 선발하여 훈련도감에 되돌려 소속되게 하였으며 1812년 수원부유수가 되었다. 지조가 굳었으며 친하고 먼 것을 가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신임이 두터웠다. [문과] 정조(正祖) 24년(1800) 경신(庚申) 별시(別試) 병과(丙科) 2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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