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조순(祖淳)


김조순(金祖淳)은 부사 김이중(金履中)과 신사적(申思迪)의 딸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서 1765년 장남으로 태어났다.초명은 낙순(洛淳). 자는 사원(士源) 호는 풍고(楓皐)이며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4대손이며 할아버지는 김달행(金達行)이고 순조의 장인이다.



1785년(정조 9) 약관에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檢閱)이 되고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발탁되어 강원도·황해도·함경도 지방의 수령·찰방 중에 겸사(兼史) 1명을 두어 그 지방의 민요와 풍속을 채록해 시정기(時政記)에 수록하자는 의견을 건의 실시하였다.



1788년 규장각의 대교(待敎) 때 당시 시·벽파(時僻派) 싸움에 중립을 지키며 당쟁을 단호히 없앨 것을 주장하였다. 1789년 동지 겸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이조참의·검교(檢校)·직각(直閣)을 거쳐 1800년 보덕(輔德)에 제수되었다.



순조 즉위 후 부제학(副提學)·행호군(行護軍)·병조판서·이조판서·선혜청제조(宣惠廳提調) 등 여러 요직이 제수되었으나 항상 조심하는 태도로 사양하였다. 1802년 양관 대제학 등을 거쳐 딸이 순조의 비(純元王后)가 되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使)로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훈련대장·호위대장 등을 역임하였다. 또한 선혜청제조로 있을 때 수효가 적은 친위병을 철폐된 장용영(壯勇營)의 군사로 충당하도록 하였다.



1814년 금위대장 1826년 양관 대제학이 되고 1827년 왕의 관서 지방 목욕 행차를 호종했다가 서하(西下) 지방의 민간 실정을 은밀하게 보고해 경외(京外) 각 아문의 절미(折米)·형정(刑政)·인사(人事)·대동미 등 어려운 실정을 정리하게 하였다. 그 뒤 실권있는 직책은 맡지 않고 제조직과 영돈녕부사로 있다가 죽었다.



어릴 때부터 기량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성격이 곧고 밝아서 정조의 사랑을 받았다. 왕세자의 보도(輔導: 보필하여 인도함)를 맡았고 국구(國舅: 왕의 장인)가 된 뒤로는 왕을 보필해 군덕(君德)을 함양시키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요직이 제수될 때마다 사양하는 것으로 보아 권세를 누리기 위해 노력한 인물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시벽의 당파나 세도의 풍을 형성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둘러싼 척족 세력들이 후일 안동 김씨 세도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문장이 뛰어나 초계문신이 되었고 비명·지문·시책문·옥책문 등 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죽화(竹畵)도 잘 그렸다. 저서로 『풍고집(楓皐集)』이 있다. 정조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여주의 현암서원(玄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안동김씨대종중
안동김씨대종중

풍고집(楓皐集)

조선후기 문신 김조순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854년에 간행한 시문집.
16권 8책. 고활자본. 1854년(철종 5) 그의 문중에서 간행하였다. 『풍고집』 권두에는 철종의 어제(御製) 서문과 총목이 있다. 권말에는 정원용(鄭元容)·김흥근(金興根)·조두순(趙斗淳) 등의 발문이 있다.
내용은 권1∼6에 1 032수의 시 권7·8은 소차(疏箚) 60편 권9는 주(奏) 3편 계(啓) 2편 응제문(應製文) 14편 제문 20편 권10은 서(書) 36편 권11은 비명 5편 묘갈 10편 권12는 묘지 7편 묘표 4편 행장 3편 권13·14는 시장(諡狀) 12편 권15는 서(序) 10편 기(記) 8편 발(跋) 7편 잠(箴) 1편 명(銘) 5편 송(頌) 2편 찬(贊) 1편 전(傳) 4편 권16은 잡저 29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풍고집』 중에 문집의 3분의 1을 시가 차지하고 있다. 이 것으로 미루어 보면 김조순이 안동김씨 세도정권의 핵심인물이면서도 문학·예술 방면에 대한 남다른 취향과 소질을 나타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학교류에 있어서 그는 비교적 당파나 신분 차이에 구속받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36편의 왕복서신은 주로 당시 요직에 있던 벌열계층(閥閱階層)들과 이루어지고 있다.
당시에 세도정권 내부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에 자료가 된다.『풍고집』의 「서얼소통수의(庶孽疏通收議)」는 1779년 (정조 3) 영향력 있는 대신으로서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조정에 건의한 것으로 보인다. 이 것은 서얼출신들이 지속적으로 벌여 온 집단적인 상소운동에 대한 정부의 개선책이 요구되고 있었던 상황에서 비롯된 것이다.
『풍고집』 권16의 잡저 중에서 서화고동(書畫古董)에 관한 김조순의 남다른 감식안을 알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예술취향은 조선 후기인 18세기에 중국을 내왕하던 지식층간에 주요관심사항으로 등장하였던 것이다. 그의 경우도 예외가 아닌 듯하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김조순묘(金祖淳墓)

흥천면 효지리(孝池里)에 썼다가 1841년(헌종 7) 이천의 부발(夫鉢)로 이장하였다.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김조순(金祖淳 1765~1832)과 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 심씨(沈氏 1766~1828)의 묘역이다. 김조순은 본관이 안동(安東)이다. 정조(正祖)가 그의 딸을 간택해 훗날 순조(純祖) 정비(正妃)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되게 한다. 순원왕후가 중전(中殿)에 책봉되자 김조순은 영안부원군에 봉해졌다. ‘김조순 묘’는 합장된 봉분 앞에 혼유석(魂遊石) 상석(床石) 향로석(香爐石) 장명등(長明燈)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묘역 좌우에 망주석도 설치되어 있다. 묘표(墓表)는 혼유석 동쪽편에 건립되어 있으며 개석방부(蓋石方趺; 지붕돌과 네모난 비석 받침) 형태로 비신(碑身)은 오석(烏石 흑색사암)으로 제작되어 있다. 묘표 앞면의 큰 글씨는 철종(哲宗)의 글씨로 오른쪽 상단에 ‘어필(御筆)’이라는 전서(篆書)가 조각되어 있다. 뒷면의 음기(陰記)는 조두순(趙斗淳)이 짓고 한호(韓濩)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묘역 하단 동남쪽에 신도비각(神道碑閣)이 있으며 신도비는 묘표와 동일한 개석방부 형태이다. 철종이 지은 어제(御製) 신도비문을 김조순의 외손(外孫) 남병철(南秉哲)이 전서(篆書)와 비문을 함께 썼다.

1785..정조 9년문과(文科)정조(正祖) 9년(1785) 을사(乙巳) 정시(庭試) 을과(乙科) 2[探花]위(03/10)

1786.01.15정조 10년가주서(假注書)
1788.12.28정조 12년대교(待敎)
1792.03.17정조 16년동지사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온 김조순을 만나다

1792.07.14정조 16년부교리(副校理)
1792.10.12정조 16년사복시정(司僕寺正)
1793.05.28정조 17년직각(直閣)
1793.06.14정조 17년장령(掌令)
1793.09.09정조 17년동부승지(同副承旨)
1796.05.12정조 20년형조참의(刑曹叅議)
1797.06.12정조 21년이조참의(吏曹參議)
1798.04.27정조 22년예조참의(禮曹參議)
1798.10.03정조 22년이조참의(吏曹參議)
1799.01.10정조 23년형조참의(刑曹叅議)
1799.02.15정조 23년예조참의(禮曹參議)
1799.07.06정조 23년이조참의(吏曹參議)
1800.02.04정조 24년병조참판(兵曹參判)
1800.08.02순조 즉위년병조판서(兵曹判書)
1800.11.27순조 즉위년제학(提學)
1801.01.24순조 1년형조판서(刑曹判書)
1801.05.19순조 1년예조판서(禮曹判書)
1801.07.04순조 1년이조판서(吏曹判書)
1802.05.18순조 2년대제학(大提學)
1802.06.05순조 2년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1802.09.02순조 2년어영대장(御營大將)
1802.09.06순조 2년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1802.09.06순조 2년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1802.09.18순조 2년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
1811.07.11순조 11년금위대장(禁衛大將)
1820.40.3순조 32년졸기(卒記)영돈녕부사 김조순이 졸(卒)하였다. 하교하기를 "애통하고 애통하다. 이것이 웬일인가? 기억하건대 지난 경신년(1800)에 영고(寧考)께서 소자의 손을 잡고 말씀하시기를 ‘지금 내가 이 신하에게 너를 부탁하노니 이 신하는 반드시 비도(非道)로 너를 보좌하지 않을 것이다. 너는 그렇게 알라.’라고 하셨는데 어제의 일과 같아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보위(寶位)에 오른 지 30여 년 동안 보필의 중요한 자리를 맡겼던 것은 왕실의 가까운 척친(戚親)이었던 까닭만은 아니었다. 오직 그는 부지런하고 충정(忠貞)하며 한결같은 마음으로 왕실을 위하여 안으로는 지극한 정성으로 힘을 다해 나를 올바르게 돕고 밖으로는 두루 다스리어 진정시켜 시국의 어려움을 크게 구제하였으니 국가가 오늘날이 있도록 보존한 것이 누구의 힘이었겠는가? 참으로 선왕(先王)께서 부탁하여 맡기신 성의(聖意)를 저버리지 않은 소치(所致)인데 이제는 끝났다. 내가 애통해 하는 것 이외에 나라의 일을 장차 어디에 의뢰하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니 물을 건너는데 노[楫]를 잃은 듯하다. 졸한 영안 부원군(永安府院君)의 집에 동원 부기(東園副器)(동원은 한(漢)나라 때 관곽(棺槨)을 제조·관리하던 관서로 궁중의 소용되는 관곽 곧 동원 비기(東院秘器)를 만들고 남은 판재(板材)) 한 벌을 실어 보내고 승지를 보내어 고독함을 구휼하게 하라. 성복(成服)하는 날에는 승지를 보내 치제(致祭)하도록 하고 역명(易名)(시호(諡號)를 내림.) 의 전례(典禮)를 태상시(太常寺)로 하여금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말고 즉시 거행하게 하며 녹봉(菉俸)은 3년을 한정하여 그대로 보내고 예장(禮葬) 등의 절차는 각 해당 부서로 하여금 전례에 의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아! 척분(戚分)으로는 비록 장인과 사위 사이이지만 정의(情義)로는 사보(師輔)를 겸하였다. 어제 한번 상면하고서 갑자기 영원히 이별하게 되었으니 비통한 생각이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성복하는 날에는 창경궁(昌慶宮)의 금천교(禁川橋)에서 마땅히 망곡(望哭)하여 한번 애통한 회포를 펼 것이니 해방(該房)에서는 자세히 알기 바란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졸한 영안 부원군 집에 원부의(原賻儀) 이외에 단속(緞屬) 10단(端)과 포목(布木) 각 1동(同) 돈 1천 냥 쌀 50석 전칠(全漆) 1두(斗)를 별도로 실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성복하는 날에는 제문(祭文)을 마땅히 손수 지어서 내릴 것이다." 하였다. 김조순은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현손(玄孫)이며 명경 왕비(明敬王妃)(순원왕후) 의 아버지이다. 용의(容儀)가 뛰어나게 아름답고 기국(器局)과 식견이 넓고 통달하여 어릴 때부터 이미 우뚝하게 세속(世俗) 밖에 뛰어났으며 젊어서 과거에 급제하고는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있으면서 공평하고 정직하여 숨김이 없음으로써 정묘(正廟)의 깊이 알아줌을 받아 특별히 뒷날 어린 왕을 보좌하는 책임을 부탁하게 되었다. 명경 왕비가 재간택(再揀擇)을 받기에 미쳐서 정묘께서 승하(昇遐)하자 정순 대비(貞純大妃)께서 선왕의 유지(遺志)로 인하여 융원(戎垣)(총융사(摠戎使)) 에 발탁하여 제수하였는데 세상을 살아나가는 길이 어렵고 위태로웠어도 흔들리지 않았으며 대혼(大婚)이 이루어지자 임금이 드디어 사심 없이 맡겼었다. 김조순이 이미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 되어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 업무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百官)을 총찰(摠察)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安危)를 책임졌던 것이 30여 년이었는데 오직 성궁(聖躬)을 보호하고 군덕(君德)을 성취하며 정의(精義)를 굳게 지키고 선류(善類)를 북돋아 보호하는 일로써 한 부분의 추모하여 보답하는 방도를 삼았기에 우리 태평 성대의 다스림을 돈독히 도울 수 있었다. 이에 조야(朝野)에서 모두 화협하여 이르기를 ‘군자(君子)의 뛰어난 덕(德)이라’고 하였으니 문장(文章)의 세상에 뛰어남은 그 나머지 일이었다. 그러나 본래 성격이 인후(仁厚)함에 지나쳐 인륜(人倫)을 돈독(敦篤)히 닦았으므로 그 미침이 더러 범박(泛博)에 이르렀으며 또 언행(言行)으로서 삼가고 조심함이 지극하여 일이 순상(循常)함이 많았으니 대개 공업(功業)을 자처하지 않았었다. 뒤에 조정의 의논으로 인하여 정조[正宗]의 묘정에 추배(追配)하였다.

1832.04.03순조 32년증(贈)영의정(領議政)
1832.04.05순조 32년시호(諡號) 충문(忠文)여국망가(慮國忘家) 근학호문(勤學好問) 나라일을 걱정하여 집안일을 잊음이 충이요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남에게 묻기를 좋아함이 문이다

1833.04.19순조 33년부조지전(不祧之典)정조 묘정에 배향

1857.11.29철종 8년추배(追配)경기(京畿) 유생(儒生) 이연긍(李淵兢) 등이 소장(疏章)을 올려 충문공(忠文公) 김조순(金祖淳)을 석실 서원(石室書院)에 추배(追配)하기를 청하니 비담(批答)하기를 "충문(忠文)과 같은 경술(經術)·덕업(德業)·사공(事功)으로 이 서원에 추배하자는 의논이 나온 것은 오히려 늦은 것이다. 청한 대로 시행하겠으니 그대들은 물러가서 학업(學業)을 연마하도록 하라." 하였다.


안동김씨대종중
문정공(상헌)파
조순(祖淳)
구보(舊譜)낙순(洛淳)
자(字)사원(士源)
호(號)풍고(楓皐)
시호(諡號)충문(忠文)廬國忘家(여국망가) 勤學好問(근학호문)나라일을 걱정하여 집안일
을 잊음이 충이요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남에게 묻기를 좋아함이 문이다.
1832
생(生)1765년 을유(乙酉) 8월 23일
관직(官職)을사(乙巳)문과(文科)
전문형(典文衡)
영안부원군(永安府院君)
증(贈)영의정(領議政)
저서(著書)풍고집(楓皐集)
 정조묘정(正祖廟庭)에 배향(配享)
졸(卒)1832년 임진(壬辰) 4월 3일
배(配)청양부부인(靑陽府夫人)청송심씨(靑松沈氏)
생(生)1766년 병술(丙戌) 2월 21일
졸(卒)1828년 무자(戊子) 8월 11일
묘(墓)이천시(利川市) 부발읍 (夫鉢邑) 가좌리(加佐里) 산五十六의二七 풍고(楓
 皐) 김조순(金祖淳) 묘역 경기도기념물二0七호
자좌(子坐) 합폄(合窆)
 부(父)정랑(正郞) 건지(健之)
 조(祖)군수(郡守) 구(銶)
 증조(曾祖)판서(判書) 택현(宅賢)
 외조(外祖)현감(縣監) 이윤언(李胤彦) 본(本) 완산(完山)
19 세20 세21 세22 세23 세
제겸(濟謙)성행(省行)이장(履長)복순(復淳)영근(泳根)
연근(演根)
옥근(沃根)
조병간(趙秉榦)
태순(泰淳)교근(敎根)
한상이(韓象履)
인순(麟淳)
이순(頤淳)문근(汶根)
한근(漢根)
송완규(宋完圭)
홍수영(洪守榮)
정인환(鄭麟煥)
준행(峻行)
원행(元行)
달행(達行)이기(履基)용순(龍淳)유근(逌根)
손근(遜根)
황종일(黃鍾一)
홍훈(洪壎)
명순(明淳)
이건원(李健源)
윤수익(尹守翼)
이중(履中)조순(祖淳)유근(逌根)
원근(元根)
좌근(左根)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남구순(南久淳)
이겸재(李謙在)
이긍우(李肯愚)
이병익(李秉益)
평순(平淳)우근(芋根)
이심재(李審在)
이장소(李章紹)
홍희명(洪羲命)
심능극(沈能極)
이경(履慶)명순(明淳)홍근(弘根)
응근(應根)
흥근(興根)
이근(儞根)
이득상(李得祥)
송재위(宋載緯)
탄행(坦行)이소(履素)지순(芝淳)조근(祖根)
보근(輔根)
충근(忠根)
이병은(李秉殷)
민덕호(閔德鎬)
이희우(李喜愚)
원순(原淳)정근(貞根)
민경호(閔景鎬)
기순(箕淳)무근(茂根)
해근(荄根)
우근(芋根)
이민초(李敏初)
심의순(沈宜淳)
이범우(李範禹)
홍서(洪垿)
심능인(沈能寅)
이희명(李羲命)
이유(履裕)지순(芝淳)
난순(蘭淳)신근(愼根)
순근(恂根)
권용수(權用脩)
송일찬(宋一儧)
조돈순(趙敦淳)
장세현(張世鉉)
구연호(具然浩)
시순(蓍淳)호근(灝根)
운순(芸淳)해근(荄根)
예순(藝淳)만근(萬根)
형순(蘅淳)제근(悌根)
이희만(李羲萬)
이혜(李꽯)
이도(履度)홍순(鴻淳)보근(輔根)
이황현(李璜鉉)
신재업(申在業)
조기항(趙基恒)
홍장섭(洪章燮)
유선(柳譱)
조우영(趙禹永)
홍대묵(洪大默)
위행(偉行)이완(履完)종순(宗淳)후근(厚根)
이헌백(李憲百)
홍낙현(洪樂賢)
이봉상(李鳳祥)
민백종(閔百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