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左議政)  이소(履素) |
자는 백안(伯安) 호는 용암(庸庵). 영의정 김창집(金昌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승지 김제겸(金濟謙)이고 아버지는 부사 김탄행(金坦行)이며 어머니는 한백증(韓百增)의 딸이다. 1764년(영조 40) 병자호란 때의 충신 후손들만을 위해 시행된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770년부터 교리(校理)·헌납(獻納) 등을 지내고 1776년에 대사간·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 때 북쪽에 흉년이 들어 영남의 곡식을 수송했는데 조운(漕運) 감독을 잘못해 파면되었다. 1778년부터 승지·도승지·부제학(副提學)·대사성을 역임하였다. 1780년에는 대사헌이 되어 홍국영(洪國榮)의 관작 삭탈을 주청했고 1781년에는 『영조실록(英祖實錄)』 편찬청 교수당상(校讐堂上)을 지냈다. 이듬해 (同知經筵事)·비변사도제조(備邊司都提調)·한성부판윤을 거쳐 1783년 예조판서로 있을 때 채제공(蔡濟恭)을 탄핵하다가 잠시 파면되었다. 이 해에 책봉부사(冊封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대향(大享: 큰 제사) 준비를 소홀히 하여 다시 파면되었다. 1784년부터 세자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형조판서·병조판서·선혜청도제조·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788년 호조판서를 지냈고 1791년에는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우의정에 올랐다. 1793년 사옹원도제조를 거쳐 좌의정에 승진했고 진하사(進賀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1796년 사역원도제조를 역임하고 동지 겸 사은사(冬至兼謝恩使)의 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이듬해 다시 동지사로 다녀왔다. 지조가 있어 옳은 일은 끝까지 추진해 정조의 신임이 두터웠다. 외교에 뛰어나 청나라에 다섯 번이나 다녀왔고 문학과 재주가 비상했으나 잘 드러내지 않았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
1764.. | 영조 40년 | 문과(文科) 영조(英祖) 40년(1764) 갑신(甲申) 충량과(忠良科) 병과(丙科) 1[探花]위(03/03) |
1764.02.10 | 영조 40년 | 가주서(假注書) |
1765.12.24 | 영조 41년 | 설서(說書) |
1767.07.04 | 영조 43년 | 주서(注書) |
1770.02.22 | 영조 46년 | 이조좌랑(吏曹佐郞) |
1770.03.23 | 영조 46년 | 교리(校理) |
1770.04.23 | 영조 46년 | 헌납(獻納) |
1770.05.29 | 영조 46년 | 남학교수(南學敎授) |
1770.07.04 | 영조 46년 | 북평사(北評事) |
1770.11.02 | 영조 46년 | 겸사서(兼司書) |
1771.02.10 | 영조 47년 | 겸문학(兼文學) |
1771.06.22 | 영조 47년 | 옥구현감(沃溝縣監) |
1772.07.02 | 영조 48년 | 동부승지(同副承旨) |
1772.07.27 | 영조 48년 | 예조참의(禮曹參議) |
1776.09.12 | 정조 즉위년 | 대사간(大司諫) |
1776.10.15 | 정조 즉위년 | 강원감사(江原監司) |
1778.04.26 | 정조 2년 | 대사간(大司諫) |
1778.05.23 | 정조 2년 | 우부승지(右副承旨) |
1779.07.15 | 정조 3년 | 병조참판(刑曹參判) |
1779.09.27 | 정조 3년 | 도승지(都承旨) |
1779.12.25 | 정조 3년 | 대사성(大司成) |
1780.02.09 | 정조 4년 | 형조참판(刑曹參判) |
1780.03.02 | 정조 4년 | 대사헌(大司憲) |
1782.12.16 | 정조 6년 | 이조참판(吏曹參判) |
1783.05.02 | 정조 7년 | 도승지(都承旨) |
1783.05.24 | 정조 7년 | 호조참판(戶曹參判) |
1783.08.13 | 정조 7년 | 병조참판(刑曹參判) |
1783.09.10 | 정조 7년 | 호조참판(戶曹參判) |
1783.09.27 | 정조 7년 | 한성판윤(漢城判尹) |
1784.06.12 | 정조 8년 | 예조판서(禮曹判書) |
1784.08.12 | 정조 8년 | 이조판서(吏曹判書) |
1784.10.06 | 정조 8년 | 좌참찬(左參贊) |
1785.02.17 | 정조 9년 |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
1785.04.28 | 정조 9년 | 예조판서(禮曹判書) |
1786.03.24 | 정조 10년 | 이조판서(吏曹判書) |
1786.04.21 | 정조 10년 | 형조판서(刑曹判書) |
1786.06.05 | 정조 10년 |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
1786.08.18 | 정조 10년 | 형조판서(刑曹判書) |
1786.10.12 | 정조 10년 | 병조판서(兵曹判書) |
1787.06.27 | 정조 11년 | 이조판서(吏曹判書) |
1787.08.14 | 정조 11년 | 예조판서(禮曹判書) |
1787.11.09 | 정조 11년 | 평안감사(平安監司) |
1789.07.03 | 정조 13년 | 이조판서(吏曹判書) |
1789.11.03 | 정조 13년 | 호조판서(戶曹判書) |
1791.07.20 | 정조 15년 | 예조판서(禮曹判書) |
1791.10.27 | 정조 15년 | 동지정사(冬至正使) |
1792.03.12 | 정조 16년 | 한성판윤(漢城判尹) |
1792.04.01 | 정조 16년 | 형조판서(刑曹判書) |
1792.04.22 | 정조 16년 | 이조판서(吏曹判書) |
1792.06.10 | 정조 16년 |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
1792.09.12 | 정조 16년 | 좌참찬(左參贊) |
1792.10.10 | 정조 16년 | 우의정(右議政) |
1793.06.22 | 정조 17년 | 좌의정(左議政) |
1794.04.19 | 정조 18년 | 귀양 좌의정 김이소를 장성부(長城府)에 귀양보냈다. 전교하기를 "대궐문을 밀어젖히고 들어가는 일은 옛사람도 행한 자가 있었는데 이보다 더 심하게는 임금의 곤룡포 자락을 부여잡기도 하고 거둥하는 임금의 말고삐를 잘라버린 자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의당 그래야 할 때에 과감히 그렇게 하였고 그토록 임금을 범하면서도 신하의 분의를 범하는 데는 이르지 않았었다. 그런데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신하의 분의를 다하지 못하고 분의를 범할 경우에는 그 죄는 나라의 일정한 형벌을 굽혀서 용서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국가의 안위가 경각에 달려있을 때에는 이따금 옛사람이 한 일을 본받기는 하였으나 그 일이 지나고 나서는 죽을 죄를 추후하여 청하면서 벌벌 떨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었으니 이는 참으로 신하의 의리로서 단지 떳떳한 법칙만을 알 뿐이요 이밖의 일은 말할 것조차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달 초 10일에 있었던 일은 분의를 범한 것인가 분의를 다한 것인가 또는 의당 그래야 할 때에 과감히 그렇게 하여 곧 옛사람의 이미 행한 일을 한 것인가. 그후에 대궐문을 마구 밀치고 들어온 것이나 의금부의 문을 뛰쳐 나온 것 정도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이른바 최초에 대궐문을 밀어젖힌 행동으로 보아서는 조정이 지금까지 존재하며 임금이다 신하다 하는 것만도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때로 말하자면 합문도 닫지 않았고 면대를 요청한 것도 두세 번을 넘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무엄하고 망측한 행동을 자행하여 사람들의 마음과 눈을 모두 놀라게 하고는 억지로 옛사람과 같이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간 것이라고 명명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실상 옛사람이 대궐문을 밀치고 들어갔던 본뜻이 아니고 다만 조정을 욕되게 한 짓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여러 사람들이 다 보고 들었으니 어찌 여러 말을 기다려서야 알겠는가. 무너지는 기강에 대해서 일체 무너지는대로 내버려두고 다스려 정돈할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니 그러고도 조정이 있고 임금이 있고 신하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현임 정승은 반열이 규장각·승정원·옥당·대간의 우두머리에 있는 사람이니 의당 그에 대한 죄를 받아야 한다. 좌의정 김이소에게 먼 곳에 귀양보내는 법전을 시행하라." 하였다. |
1795.01.26 | 정조 19년 |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
1798.08.24 | 정조 22년 | 졸기(卒記) 영돈녕부사 김이소(金履素)가 죽었다. 김이소의 자(字)는 백안(伯安)이고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의 증손이다. 영종(英宗) 갑신년에 충량과(忠良科)로 등제(登第)하였는데 상의 총애가 극진하였으며 관직을 두루 거쳐 호조와 양전(兩銓)249) 의 판서에 이르렀고 임자년에 정승이 되었다. 질박 정직하고 확고 부동하여 옳은 것을 보면 굳게 지키면서 흔들림이 없었으므로 재유(才猷)와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드러난 것은 없었어도 위에서 의지하며 늘 중하게 여겼다. 그의 동생이 홍락순(洪樂純)의 사위가 되었는데 홍락순이 죄로 쫓겨날 적에 온 조정이 성토(聲討)하였으나 그만은 도헌(都憲)250) 으로 있으면서 의리상 인피(引避)하며 사직하니 상이 늘 그의 돈독한 우애심을 칭찬하였다. 김이소의 병이 위독해지자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 진찰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자 하교하기를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식을 갑자기 듣고 보니 참말이 아닌 것처럼 의심되기만 한다. 놀랍고 가슴 아픈 심정을 어떻게 말로 하랴. 확고 부동하게 지키는 바가 있어 모습만 보아도 어떠한 인물인지 알 수가 있었는데 조정에서 그를 따르고 의지한 것이 과연 어떠했던가. 연전에 한번 겪어보고는 바로 경탄하였는데 더구나 고가(古家) 교목(喬木)의 나뭇잎이 시들어 떨어지니 더욱 심회를 금할 수가 없다." 하고 이어 조문·제사·장례·시호(諡號)와 녹봉을 지급하고 고자(孤子)를 녹차(錄差)하는 등의 일을 모두 관례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
1798.09.07 | 정조 22년 | 시호(諡號) 익헌(翼憲) 思慮深遠(사려심원) 行善可紀(행선가기)생각이 깊고 원대함이 익이요 행동이 착하여 본보기가 될만함이 헌이다. |
문정공(상헌)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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