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의정(領議政)  김창집(金昌集) |
![]() ![]() 1673년 동생 김창흡과 함께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1675년 부친 김수항이 화를 입고 영암(靈巖)에 유배된 이후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1678년 부친이 철원(鐵原)으로 양이되자 함께 영평(永平) 백운산(白雲山) · 용화산(龍華山) 삼부연(三釜淵) 등을 유람하였다. 1680년 환국 뒤 부친이 영의정이 된 이듬해 내시교관이 되었다. 1684년 장악원 주부 · 공조좌랑이 되고 9월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乙科) 1위로 합격 예조 좌랑 · 전적이 되었다. 이듬해에 정언 · 지평 · 경기 도사(都事)를 거쳐 1686년 부수찬이 되고 이조 좌랑이 되어 교서관 교리를 겸하였다. 1689년 기사환국 뒤 중부 김수흥과 부친이 유배되자 부친을 따라 진도(珍島)로 갔으며 부친이 유배지에서 사사(賜死)되자 영평의 백운산 송노암(送老菴)에 은거하면서 「두시집구(杜詩集句)」를 지었다. 1694년 갑술환국으로 정국이 바뀌어 부친이 복관(復官) 사제되고 동부승지 · 예조 참의 · 대사간 ·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철원(鐵原) 부사를 제수 받았는데 이 때 큰 기근이 들고 도둑이 들끓어 민정이 소란하자 관군을 이끌고 토평하였다. 강화유수 · 예조참판 ·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고 호조 · 이조 · 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약방 제조 · 관상감 제조 · 진휼청 제조 등을 겸하였고 한성부판윤 · 우의정 이어서 좌의정에까지 이르렀다. 1712년에는 사은사로 청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 청나라의 사정을 보고하였고 서로(西路)의 민폐를 상소하였다. 이 해에 숙종이 화원화가(僻隱) 진재해(秦再奚)로 하여금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 1717년 기로사(耆老社)에 들어갔고 영의정에 올랐다. 노론으로서 숙종 말년 세자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다가 소론의 탄핵을 받았고 1720년 숙종이 승하하자 영의정으로 원상이 되어 서정(庶政)을 맡았다. 경종이 즉위하여 자녀가 없자 후계자 선정문제로 노론 · 소론이 대립하였다. 이 때 영중추부사 이이명(李頤命) · 판중추부사 조태채(趙泰采) · 좌의정 이건명(李健命) 등과 함께 노론 4대신으로서 연잉군〔延祁君 영조〕을 왕세자로 세우기로 상의하고 김대비(숙종의 계비)의 후원을 얻었다. 경종의 비 어씨와 국구(國舅)인 어유구(魚有龜) · 사직 유봉휘(柳鳳輝) 등의 격렬한 반대가 있었지만 결국 실행하게 되었다. 1721년 다시 왕세제(王世弟)의 대리청정(代理聽政)을 상소하여 경종은 대소 정사를 왕세제에게 맡길 것을 허락하였으나 소론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수개월 뒤 소론의 극렬한 탄핵으로 노론이 축출되고 소론 일색의 정국이 되었다. 곧 이어 소론의 김일경(金一鏡) · 목호룡(睦虎龍) 등이 노론의 반역도모를 무고하여 신임사화가 일어나자 왕위 계승자를 정하는 일과 대리를 청한 노론 4대신의 안치를 청하여 거제도에 위리안치 되었고 아들 김제겸은 울산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성주에서 사사(賜死)되고 아들은 부령 적소에서 사사되었으며 가솔들은 7군으로 유배되었다. 1724년 영조 즉위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시호는 충헌(忠獻)이다. 영조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고 영조 때 과천의 사충서원(四忠書院)에 이이명 · 조태채 · 이건명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국조자경편(國朝自警編)』 · 『몽와집(夢窩集)』 등이 있다. 『몽와집』권1 뒤에는 정조(正祖)가 본집을 을람(乙覽)한 뒤 지은 칠언절구 「람몽와유고(覽夢窩遺稿)」가 추록(追錄)되어 있다. 찬문으로는 <김성대묘비(金聲大墓碑)>가 있으며 필적은 해창위기실 앞으로 보낸 간찰이 남아있다. 현종(顯宗) 14년(1673) 계축(癸丑) 식년시(式年試) [진사] 2등(二等) 6위 [문과] 숙종(肅宗) 10년(1684) 갑자(甲子) 정시(庭試) 을과(乙科) 1[亞元]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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