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제학(大提學)  창협(昌協) |
경기도 과천 출신. 자는 중화(仲和) 호는 농암(農巖)·삼주(三洲). 좌의정 김상헌(金尙憲)의 증손자이고 영의정을 지낸 김창집(金昌集)의 아우이다. 아버지는 영의정 수항(金壽恒)이며 어머니는 안정 나씨(安定羅氏)로 해주목사 나성두(羅星斗)의 딸이다. 1669년(현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2년(숙종 8) 증광문과에 전시장원으로 급제하여 전적에 출사하였다. 이어서 병조좌랑·사헌부지평·부교리 등을 거쳐 교리·이조좌랑·함경북도병마평사(咸鏡北道兵馬評事)·이조정랑·집의·동부승지·대사성·병조참지(兵曹參知)·예조참의·대사간 등을 역임하고 명에 의해 송시열(宋時烈)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를 교정하였다. 청풍부사로 있을 때 기사환국으로 아버지가 진도에서 사사되자 사직하고 영평(永平)에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 이후 아버지가 신원됨에 따라 호조참의·예조참판·홍문관제학·이조참판·대제학·예조판서·세자우부빈객·지돈녕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직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김창협은 학문적으로는 이황(李滉)과 이이(李珥)의 설을 절충하였다. 사단(四端)은 선(善)뿐이고 칠정(七情)은 선과 악을 겸했으니 사단은 오로지 이(理)만 뜻하고 칠정은 기(氣)를 겸한 것이다.라는 이이의 설에 대해 다만 기까지 겸하였다는 한 구절에서 차이를 보인다. 칠정이 비록 이와 기를 겸했더라도 그 선한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랐음이요 그 선하지 않은 것은 기가 능히 이를 따르지 않은 것이니 처음부터 기가 주된 것이다.라고 하여 이이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지지하였다. 김창협은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도 기의 맑은 것은 모두 선하지만 선한 정(情)이 모두 맑은 기에서 나왔다 함은 옳지 않으며 정의 악한 것이 탁(濁)한 기에서 나왔지만 탁한 기가 발(發)해 된 정이 모두 악하다고 할 수는 없다.라고 말한다. 또한 김창협은 인심의 동(動)함에 이가 비록 기에 탔어도 기가 또한 이의 명령을 듣는 것이다. 만약 선악의 정을 모두 기의 청탁에 돌린다면 이의 실체와 성(性)의 선함을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성악론변(性惡論辨)」에서 김창협은 사람의 성은 본래 선한 것이나 순경(荀卿)이 인성을 악하다고 말한 것은 기요 성이 아니다. 대체로 사람이 세상에 날 때 기는 질(質)이 되고 이는 성이 되는 것인데 이에는 선만 있고 악이 없으나 기에는 선한 것도 있고 선하지 못한 것도 있으니 사람에게 선하지 못함이 있음은 기의 소위이다.라고 규정하였다. 김창협의 문장은 단아하고 순수하여 구양수(歐陽修)의 정수를 얻었으며 김창협의 시는 두보(杜甫)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대로 모방하지 않고 고상한 시풍을 이루었다. 특히 문장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써서 「문정공이단상비(文貞公李端相碑)」·「감사이만웅비(監司李萬雄碑)」·「김숭겸표(金崇謙表)」·「김명원신도비전액(金命元神道碑篆額)」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저서로는 『농암집(農巖集)』·『주자대전차의문목(朱子大全箚疑問目)』·『논어상설(論語詳說)』·『오자수언(五子粹言)』·『이가시선(二家詩選)』 등이 있고 편저로는 『강도충렬록(江都忠烈錄)』·『문곡연보(文谷年譜)』 등이 있다. 숙종의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
농암집(農巖集)조선후기 문신·학자 김창협의 시·소·서(書)·기 등을 수록한 시문집. |
1669.. | 현종 10년 | 진사(進士) 현종(顯宗) 10년(1669)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진사] 3등(三等) 44위(74/100) |
1682.. | 숙종 8년 | 문과(文科) 숙종(肅宗) 8년(1682) 임술(壬戌) 증광시(增廣試) 갑과(甲科) 1[壯元]위(01/35) |
1683.04.28 | 숙종 9년 | 지평(持平) |
1683.07.11 | 숙종 9년 | 부교리(副校理) |
1683.12.10 | 숙종 9년 | 헌납(獻納) |
1684.01.16 | 숙종 10년 | 교리(校理) |
1684.02.10 | 숙종 10년 | 헌납(獻納) |
1684.07.03 | 숙종 10년 | 이조좌랑(吏曹佐郞) |
1684.11.26 | 숙종 10년 | 경상도암행어사(慶尙道暗行御史) |
1685.05.18 | 숙종 11년 | 북평사(北評事) |
1686.02.14 | 숙종 12년 | 수찬(修撰) |
1686.03.27 | 숙종 12년 | 이조정랑(吏曹正郞) |
1686.06.14 | 숙종 12년 | 장악원정(掌樂院正) |
1686.06.16 | 숙종 12년 | 집의(執義) |
1686.06.17 | 숙종 12년 | 동부승지(同副承旨) |
1686.07.20 | 숙종 12년 | 대사성(大司成) |
1686.11.04 | 숙종 12년 | 병조참의(兵曹叅議) |
1687.01.19 | 숙종 13년 | 대사간(大司諫) |
1687.11.21 | 숙종 13년 | 청풍부사(淸風府使) |
1688.03.07 | 숙종 15년 | 대사성(大司成) |
1694.04.27 | 숙종 20년 | 호조참의(戶曹叅議) |
1694.05.26 | 숙종 20년 | 부제학(副提學) |
1694.06.21 | 숙종 20년 | 대사간(大司諫) |
1694.08.11 | 숙종 20년 | 동부승지(同副承旨) |
1696.05.15 | 숙종 22년 | 홍문제학(弘文 提學) |
1696.09.21 | 숙종 22년 | 이조참판(吏曹叅判) |
1698.07.26 | 숙종 24년 | 대사헌(大司憲) |
1699.07.07 | 숙종 25년 | 이조참판(吏曹叅判) |
1700.06.13 | 숙종 26년 | 대사헌(大司憲) |
1702.02.02 | 숙종 28년 | 동돈녕부사(同敦寧府事) |
1705.11.08 | 숙종 31년 | 대사간(大司諫) |
1706.02.06 | 숙종 32년 | 대제학(大提學) |
1706.04.09 | 숙종 32년 | 형조판서(刑曹判書) |
1706.04.23 | 숙종 32년 | 예조판서(禮曹判書) |
1706.08.09 | 숙종 32년 | 대사헌(大司憲) |
1708.04.11 | 숙종 34년 | 졸기 지돈녕부사(知敦寧府使) 김창협(金昌協)이 졸(卒)하였다. 김창협의 자(字)는 중화(仲和)로서,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의 둘째 아들이다. 천성이 온수(溫粹)하고 청결하여 한 점(點)의 더러운 세속의 기운이 없고, 문장(文章)은 농욱(醲郁)(맛이 진함) 을 모방하여 육일거사(六一居士)(송(宋)나라 문호(文豪) 구양수(歐陽修)의 호(號).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한 사람. 문장이 농욱(醲郁)하다고 함.) 의 정수(精髓)를 깊이 얻었다. 국조(國朝) 이래로 작자(作者)는 1, 2분[公]에 불과(不過)했는데, 김창협이 정립(鼎立) 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시(詩)도 역시 한(漢)·위(魏)를 출입하면서 소릉(少陵)(당(唐)의 시인(詩人) 두보(杜甫)의 호) 으로 보익(補翼)하였다. 고고(高古)(고상하고 풍취가 있슴) 하고 아건(雅健)(필력(筆力)이 고상(高尙)하고 기운참) 하여, 천박한 문장을 일삼지 않았는데, 조금 후에 이것은 우리 선비[吾儒]가 끝까지 할 사업은 되지 못한다고 여겨 마침내 육경(六經)(여섯 가지 경서(經書). 곧 《역경(易經)》·《서경(書經)》·《시경(詩經)》·《춘추(春秋)》·《예기(禮記)》·《악기(樂記)》. 《악기》 대신 《주례(周禮)》를 넣기도 함.) 에만 오로지 정진하여 염락 관민(濂洛關閩)의 학(學)(송(宋)나라 염계(濂溪)의 주돈이(周敦頤), 낙양(洛陽)의 정호(程顥), 그 아우 정이(程頤), 관중(關中)의 장재(張載), 민중(閩中)의 주희(朱熹)가 제창한 유학(儒學).) 에 미쳐서 침함(浸涵)(학문에 젖어듦.) 하고 연이(演迤)(널리 행함) 하여 침식(寢食)을 잊기까지 하니, 견해(見解)가 정확(精確)하고 공부(工夫)가 독실(篤實)하여 요즘의 변통성이 없는 선비에 비길 수 없었다. 주자서(朱子書)에 공력(功力)을 씀이 더욱 깊어, 송시열(宋時烈)이 《주문차의(朱文箚義)》를 저술할 때에 그의 말을 많이 인용하였다. 만년(晩年)에 의리(義理)가 꽉 막히고 사문(斯文)이 갈라지고 찢어지는 때를 당하매, 명의(名義)를 표정(表正)하고 사피(邪詖)함을 물리치는 것으로써 자기의 임무를 삼으니, 세도(世道)가 힘입어서 유지(維持)되어 울연(蔚然)히 유림(儒林)의 으뜸[宗]이 되었다. 종학(從學)하는 자가 매우 많았는데 훈회(訓誨)하기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후생(後生) 가운데 문사(文詞)를 바로잡을 자가 있으면 문득 이끌어서 학문(學問)에 나아가게 하였다. 젊어서 괴과(魁科)(과거(科擧)에서 문과(文科)의 갑과(甲科)를 이르는 말.) 에 올라, 명망이 한 시대를 굽어보았다. 법연(法筵)에 진강(進講)하니, 순부(淳夫)(송(宋)나라 유학자 범조우(范祖禹)의 자(字). 평상시에는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지마는, 일을 만나면 시비(是非)를 분변하여 밝혔음.) 처럼 삼매(三昧)( 마음을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일심 불란(一心不亂)함.) 의 경지에 있다는 성예(聲譽)가 있었다. 더욱 군덕(君德)의 궐유(闕遺)에 권권(眷眷)(잊지 않고 돌봄) 하고, 일을 만나면 규절(規切)(경계하여 바로잡음) 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피(避)하지 않았다. 기사년(1689 숙종 15년) 의 화(禍)를 만나자, 다시는 당세(當世)에 뜻을 두지 않았고, 경화(更化)(갑술년의 정국 변동) 한 뒤에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았다. 궁산(窮山)에서 굶주림을 참아가면서 굳게 지조를 지키면서 한평생을 마쳤으니, 비록 지취(志趣)가 다른 자라도 또한 높이 우러러 공경하여 미치기 어렵다고 여겼다. 대개 그의 자품(資稟)의 순수함과 문장(文章)의 높음과 학술(學術)의 심오함을 논(論)하면, 모두가 남보다 뛰어났으니, 진실로 세상에 드문 홍유(鴻儒)(대학자(大學者)) 가 될 만하다고 하겠다. 이때에 이르러 졸(卒)하니 나이가 58세이었다. 태학생(太學生)(성균관 유생(成均館儒生)) 들이 관(館)을 비우고 와서 전(奠)을 올렸고, 학자(學者)들이 그를 ‘농암 선생(農巖先生)’이라고 일컬었다. 문집(文集) 34권(卷)이 있어 세상에 행하여졌으며, 뒤에 문간(文簡)이란 시호(諡號)를 내려 주었다. |
1725.07.28 | 영조 1년 | 시호(諡號) 문간(文簡) 道德博聞(도덕박문) 一德不懈(일덕불해)도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이 많음이 문이요 순일한 덕으로 느슨함이 없음이 간이다 |
1860.12.10 | 철종 11년 | 부조지전(不祧之典) |